[박지웅 목사의 시편] 성탄, 하나님의 초청
입력 2012-12-23 17:37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 이런 사연이 있었다. 한 중학교 여학생이 수학여행을 앞두고 신발과 가방을 사겠다고 떼를 쓰다가 엄마와 심하게 다투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홧김에 휴대전화 배터리도 뽑아버리고 길을 걷는데 엄청난 지하철 사고가 난 것을 알았다. 불길한 느낌에 전화를 하니 엄마가 받지 않는다. 그 대신 엄마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었다. ‘내 딸아 용돈을 넉넉히 못줘서 미안해. 쇼핑센터에 들러서 신발이랑 가방이랑 샀는데, 미안하다. 못 전하겠어. 오늘 돈가스 해 주려고 했는데 미안하다 내 딸아. 정말 사랑한다.’ 이것이 불타는 지하철 안에서 엄마가 보낸 마지막 인사였다. 돈가스를 해 주며 작은 행복을 나누고 싶은 소박한 바람도,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의 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인간은 죽음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만 그러한가? 죽음만이 아니라 인간은 삶도 감당이 안 된다. 몇 년 전 우리나라 대기업의 한 부사장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고속승진을 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가장 비싼 아파트에 사는 모든 샐러리맨들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는 것이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삶을 선택하고, 삶이 감당되지 않을 때 죽음을 선택한다. 나에게 너무 비관적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적어도 삶과 죽음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 답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인생은 속수무책이다.
유다왕 아하스가 하나님께로부터 ‘임마누엘의 약속’을 받을 당시, 그의 상황도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북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연합군이 남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땅에서는 희망이 없어도 하늘에 희망이 있으니 하늘을 쳐다보는 믿음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하스에게는 믿음이 전혀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다면 믿음을 친히 주겠다며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발뺌한다. 믿음을 가지고 싶은 의욕조차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거기다가 믿음도 없는 상황, 나아가서 믿고 싶은 의욕조차 없는 상황. 이 정도라면 유다는 망하고 역사는 끝나야 한다. 그러나 유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개입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입의 징표로 주신 이름이 ‘임마누엘’이었다. 700년 후 예수님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의 오심은 대책 없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개입이다. 성탄의 종소리가 삶과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생들, 그들을 향한 초청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왜 알지 못할까?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