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진 (4) 비운의 세계 챔프 김성준 “영진아, 나 권투하고 싶어”

입력 2012-12-23 17:41


배재고에 진학하면서 동네 친구들과 점차 멀어져갔다. 그럴수록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쌓여갔다. 특히 김성준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먹먹해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입시에 대한 중압감에 밀려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의사가 되라고 했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지만 부족했다. 어머니는 연세대를 추천했다. 기독교계 학교인 배재를 보냈을 때와 같은 이유였다. 내 성적으로 연세대 치과대학은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치대는 싫었다. 아버지도 반대했다. 아버지는 대안으로 생물학과를 권했고,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캠퍼스의 아름다움에 빠졌고,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성준이 형 소식 들었어요?”

하루는 동네 후배가 나를 찾아왔다.

“무슨 얘기를 들었어?”

“누가 서울역 근처에 봤다고 하던데요.”

심장이 빨라졌다. 서울역에 가면 당장 내 친구를 만날 수 있겠다 싶었다. 그 길로 서울역에 갔다. 몇 개월 동안 거의 매일 서울역 근처를 뒤졌다. 당구를 치지도 못하면서 일부러 당구장에 들어가 당구를 치기도 했다. 혹시 만날까 싶어 하루에 몇 군데씩 다방에 들어가 앉아있기도 했다. 결국 어느 다방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성준이를 만났다. 밤새 지난 시간의 얘기를 들었다. 가출 후 신문팔이 구두닦이 껌팔이 등을 전전했던 얘기를 들었다.

어린 날의 그리움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성준이가 권투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함께 체육관에 갔다. 시간이 날 때면 링 사이드에서 세컨을 봐주기도 했다. 성준이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금세 플라이급 신인왕이 됐다.

성준이는 종종 경기 입장권을 보내줬다. 1975년 학군으로 임관 후 외박을 허락받아 경기를 보러간 적도 있다. 성준이는 76년 초 한국챔피언에 올랐고, 78년에는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됐다.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며 온다. ‘비운의 복서’ 김성준.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말할 때 좀더 세밀하게 살펴봤으면, 내가 좀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더라면 그를 전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준이 권투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동안 나는 통기타에 빠져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과 야유회를 갔다. 그 자리에서 대광고 출신의 동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 친구에게 기타를 배웠다. 남산교회 청년부 추수감사예배 때 특별찬양을 하기도 했다. 대학 보컬대회에 나가 통기타 부문 1등을 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기타 듀엣을 결성했다. 듀엣 이름은 서로의 이름을 따서 ‘영 토이스’로 정했다. 그 친구 이름은 완구였다.

우리는 큰 무대에 나가기로 의기투합,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있던 내슈빌이란 음악다방에 가서 오디션을 봤다. 1주일에 2번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어니언스나 김태곤 등과 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영 토이스’ 생활은 길지 않았다. 2학년 때 친구가 군에 입대하면서 팀은 해체됐다. 고별 공연은 가톨릭 학생회관을 빌려서 했다. 급하게 연습하느라 오르간 반주자를 구했다. 그때 반주를 해 준 사람이 지금 내 아내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군단에 지원했다. 첫 훈련은 악몽 같았다. 야영훈련은 최악이었다. 나름대로 어려서 거칠게 놀았다고 자부했지만 그건 자만심이었다. 엄격한 조직생활과 극도의 긴장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훈련은 견디기 어려웠다. 화장실에서 여러 번 울었다. 안 하던 기도도 절로 나왔다.

마침내 기다리던 퇴소식 날이 왔다. 머릿속은 온통 ‘바깥’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 벌어졌다. 훈련을 잘하지도 못했는데 군사령관상을 받은 것이다. 연세대 학군단에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학군단 생활을 하면서 성격은 점차 외향적으로 바뀌어 갔다.

정리=전재우 기자 jw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