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손영옥] 대통령을 소비하시렵니까

입력 2012-12-21 18:23


“대학교수도 서비스 정신이 필요해요. 학생을 고객으로 생각하는 그런 마인드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비싼 등록금 냈으니 학생도 서비스 받을 자격 있는 거 아니겠어요!”

대학가에 교수평가제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1990년대 말쯤으로 기억된다. 교수인 지인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너무나 신선하게 들렸다. 몇 년째 들고 다녀 나달나달해진 일부 교수들의 강의 노트를 속수무책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교수평가제는 낡은 초가지붕을 일소한 개량 슬레이트 지붕마냥 혁신적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대한민국에는 사회 전 분야에 ‘지식 서비스 평가 바람’이 몰아쳤다. 교수평가제는 초중고 교원평가제로 확대 실시됐다.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치는 기업에 파고든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서비스’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더 이상 물건만 파는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나. 경험과 분위기조차 상품이 되는 시대에 서비스는 물건에 아우라를 입혀 부가가치를 높여주는 마술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 대표 가전회사 삼성과 LG가 가전의 제왕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시장을 제패할 수 있었던 힘도 서비스에 있다. ‘빨리빨리 애프터서비스’를 현지화한 전략이 주효했다. “냉장고 고장 접수 하루 만에 고쳐주면 입을 다물지 못해요. 유럽인들은 수리에 1주일 이상 걸리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거든요.”(2006년 당시 LG전자 영국 법인 김희웅 서비스 총괄 매니저)

그러므로 소비자에게 최대한 왕의 느낌을 갖게 하라. 이는 인간관계마저 상품화되는 21세기 소비사회에 내려진 지상 명령이다. 그가 냉장고를 사는 주부이든, 지식을 구매하는 학생이든 상관없다. ‘개그콘서트’에 등장하는 정 여사의 ‘브라우니, 물어!’는 그런 소비자 만능 사회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소비만능 사회의 피로감과 부작용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한 교수로부터 얼마 전 이런 푸념을 들었다. “요즘 학생들 권리의식 대단해요. 결석을 해서 강의를 듣지 못했으니 빼먹은 수업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 달라는 거 있지요.”

네이버에서 검색어만 치면 지식이 자판기보다 더 빨리, 그것도 공짜로 나오는 정보 과잉의 시대다. 대학 수업은 학생들이 소비할 지식상품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문제는 지식소비자로서의 학생들의 권리의식, 즉 어떤 의무도 따르지 않는 공짜의식이다. 이는 학문 태도, 나아가 삶의 태도의 수동성을 낳는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선생님 탓, 부모 탓의 응석 문화가 길러지는 것이다.

소비사회의 망령은 돈이 매개되지 않는 분야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국가도 소비하는 시대가 됐다. 국가 소비자인 국민은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기대하면서 정부를 상품 다루듯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경희대 교수로 있는 동양학자 임마뉴엘 페스트라이쉬는 최근 저서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다산북스)에서 국가 소비사회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표를 던짐으로써 권력을 쥐게 된 이들이 골치 아픈 것들을 말끔히 정리해주고,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 불평이나 주고받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기를 점점 더 바라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시민으로 생각하기보다 일종의 소비자, 즉 국가라는 서비스 주체의 고객으로 여기기 시작할 때 정치적 수동성을 배태하며 민주주의는 왜곡될 수 있다고 한다. 새 대통령이 탄생했다. ‘시민의식의 회복’을 주장한 이 책이 어느 때보다 울림을 갖는 시점이다. 일독을 권한다.

손영옥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