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환의 해피 하우스] 소유냐 존재냐

입력 2012-12-21 18:26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그동안 ‘소유’를 목적으로 샀던 옷, 보석 등과 음악회 티켓, 겨울여행 등과 같이 자기 ‘존재’의 새로운 경험을 목적으로 지출했던 것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하고, 무엇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했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존재’를 위한 구매가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사람이 57%, ‘소유’를 위한 구매가 더 행복하게 했다는 응답이 34%, 무응답이 9%였다.

2003년 코넬대학 길로비치(Thomas Gilovich) 교수팀이 발표한 이 연구는 현대인의 경제생활에서 소유지향적인 지출보다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기 위한 존재지향적인 지출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존재지향적인 지출의 특징은 대부분 자기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감상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사랑을 나누고 치유와 성장을 경험하며 미래를 설계하기도 한다. 설혹 혼자서 음악 감상이나 여행을 하더라도 음악가들의 연주에 감동하기도 하고, 여행객들과 새로운 친교를 하며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의 경험으로 행복을 누린다.

“소유냐? 존재냐?”라는 질문은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젊은 시절 마음에 깊이 다가온 화두이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는 나라가 너무 가난했다. 모두 잘살아 보자고 몸부림을 치던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근검절약과 근면성실이 몸에 배었다. 그러다가 청년기에 맞이한 산업화 물결로 풍요를 추구하는 홍수 속에서 살아야 했다. 범람하는 물질 만능의 탁류 속에서 그들은 배우자를 선택하여 가정을 이루고, 직업을 선택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존재지향적인 선택이 어려웠으며 많은 사람들이 소유 지향적이었다. 영리한 듯 소유지향적인 친구들이 미련한 듯 존재지행적인 친구들을 앞지르고 선두 그룹을 이루며 장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제 노년기를 맞이하는 그들의 눈빛과 발걸음에 작지만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존재지향적인 사람들의 눈빛과 발걸음에는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비록 더 풍요로운 환경을 이루었지만 눈빛과 발걸음이 허허로워 보인다. 여전히 무엇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아직도 무엇을 더 소유해야 된다는 듯 조급하다. 이렇게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과 존립이 소유의 양과 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착각하므로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평생을 소비하고 만다.

내가 상담한 베이비부머 한 사람은 전형적인 소유지향적인 결혼과 직장을 선택했었다. 일중독자로 살다보니 모두들 부러워하는 출세를 했다. 그러나 가정생활은 매우 불행했으며, 정년퇴임 후에는 끝내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는 늦게나마 소유지향적인 삶을 후회하며, 존재지향적인 삶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야 명상훈련과 단소 등을 배우며 마음의 평안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그러나 이미 한 평생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광야로 나아가도록 명령하셨다. 광야는 무소유를 상징하는 삶이다. 오직 하루분의 만나를 소유하는 것 외에는 존재만을 직면하는 삶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40일 광야기도 후에 겪는 시험은 소유냐 존재냐의 선택을 상징한다.

물론 우리에게 생존을 위해서 상당한 소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소유에서 행복의 원천을 찾으려는 데 있다. 소유로는 결코 인생의 공허감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신학대학교 상담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