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신목교회] 한 교회서, 한 믿음… “우린 축복받았지”

입력 2012-12-21 20:30


전북 익산시 함라면 신목교회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 논밭. 신목교회는 전북 익산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함라면 신목리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위치해 있다.

남병산에 둘러싸인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용이 숨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런 이유로 소룡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목교회는 무속 신앙이나 사찰이 뿌리내렸을 법한 외진 마을 어귀에 자리 잡고 있다.

주민 손으로 만들고 키운 교회

소룡마을에는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있는 70대 이상의 어르신 80여명이 살고 있다. 신목리가 충남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해서인지 주민들의 전라도 사투리에는 ‘그랬어유’ 같은 충청도 방언이 섞여 있었다. 박여분(76) 할머니는 “저기 산 넘으면 금강이 있으니께 그런 거 아니유. 저 밑에 사람들은 우리 보고 전라도 사람도 아니라고 그랑께”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만난 주민들은 마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뒷산에서 뛰어놀던 때부터 교회에서 결혼반지를 끼던 장면까지 이 마을 구석구석에 그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09년 신목교회에 부임한 조정애(47) 목사는 “주민 분들은 거의 이곳에서 태어나서 줄곧 마을을 떠나지 않은 분들이라 항상 추억 속에 젖어 사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자매 같은 71세 동갑인 김영자 전도사, 장춘자 권사, 임영애 권사는 무엇보다 신목교회 개척 당시 주일학교를 함께 다닌 추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임 권사는 “성탄절에 노트, 연필, 성경책 같은 선물을 한 포대씩 타서 집에 갔었다”면서 얘기를 꺼냈다. 장 권사는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는데 새벽송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옷이 다 젖었는데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참 기억에 남는 성탄절이었다”고 했다.

김 전도사는 “부흥성회를 하는 날이면 우리 집에 셋이 모여서 동치미에 찬밥을 먹고 고구마도 쪄먹고 참 재밌게 신앙생활을 했다”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는 1963년 신목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세 자매’는 고(故) 장화일 장로의 행랑채에 마련된 임시예배당에서 성경말씀을 공부하며 우정을 키웠다. 신목교회의 전신이 바로 이 예배당이다. 바닥에 가마니가 깔려 있고 여기저기 먼지가 날리는 열악한 공간이었지만 풍금 반주와 함께 울려 퍼지는 찬양은 어느 교회 못지않게 뜨거웠다고 한다.

이후 임시예배당은 현재 터에 목조 건물로 세워졌다가 벽돌과 콘크리트로 신축됐다. 교회 이름도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딴 소룡교회였다가 90년대 후반 행정구역명을 감안해 신목교회가 됐다. 교회를 리모델링할 때마다 주민들은 너나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도왔다.

이장 장운선(70) 권사는 “교회 바닥 공사할 때 사람들이 안 나올 줄 알고 걱정을 참 많이 했었는데 교회 나오는 사람, 안 나오는 사람 할 거 없이 죄다 나와서 한나절에 다 끝냈다”고 말했다. 권태욱(77) 집사는 “그때는 돈이 없응께 부락민들이 공사하는 데 많이 협조를 했다”며 “안식구가 교회에 먼저 다녔고 나는 교회는 안 다닌 때였지만 ‘일 좀 해 달라’는 장로님 부탁받고 여러 번 일했지”라고 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시작된 신목교회는 3대째 이어오는 독실한 장씨 가족의 헌신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54년 신목교회를 설립한 고 장화일 장로에 이어 2대 고 장기천 장로는 교회 신축 부지 660여㎡(약 200평)를 헌납했다. 3대 장상호(77) 장로는 교육관과 사택 건축, 승합차 구입을 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장 장로는 행랑채 예배당 시절 ‘71세 세 자매’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이들 3명을 바라보면서 “어여쁜 초등학생 때 본 게 눈에 선한데 이젠 할머니가 다 됐네…. 그때는 교회에서 야학도 하고 한글도 가르치고 그랬지”라고 말했다.

장 장로는 옛일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할아버지하고 한 이불 덮고 있으면서 신앙을 많이 받았어요.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접하신 할아버지는 군산에 있는 교회까지 가서 예배를 보던 분이에요. 그러다가 이 마을에 교회를 세우신 거죠. 늘 한문 성경책을 보시던 할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가르침은 무슨 일이 있든지 주일날은 꼭 지키라는 거…. 그 말씀대로 일평생 주일을 잘 지켰고 축복 속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대선을 하루 앞두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만 마을에서 추진하는 전통 테마마을 사업을 잘 도와줄 수 있는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사업은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특산품인 구절초를 판매하는 것이다.

한 할아버지는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테레비(텔레비전) 본께로 별로 뽑을 사람도 없다”면서 “마을 사업 잘 도와주는 사람이면 다 좋다”고 했다. 다른 어르신은 “여기는 전북이니까 어찌됐든 뿌리가 배어 있다”면서 넌지시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지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천국 가는 순간까지 고향 교회에서

“시설에 가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게 제일 두려워.” “병원에서 죽는 건 죽기보다 싫은데 집에서 조용히 죽고 싶어도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마지막 날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어하는 어르신들에게 ‘마을을 뜬다’는 말은 ‘요양병원에 간다’는 의미였다. 대부분 홀로 사는 어르신들은 노환이 짙어지면 마을을 떠나 병원신세를 지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익산의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어르신은 3명이다.

그러다보니 이 마을에선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 자체가 상을 받을 만한 일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이성숙(54) 집사. 지난 5월 그는 신목교회에서 금일봉과 함께 효부상을 받았다.

이 집사는 수시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예배당을 찾는다. 10년 전 중풍을 앓던 시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적적해 하는 시어머니가 교회에 오면 편안해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집사 자신도 5년 전 당뇨 합병증을 앓던 남편을 떠나보낸 뒤 허한 마음을 교회에서 달래곤 했다.

이 집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는 성경말씀처럼 어렵고 힘들어도 믿는 마음이 있응께 극복하고 산다”고 말했다. 시어머니 이복희(85) 집사는 “그냥 나는 며느리가 맘에 들어. 다 내 맘에 들게 해”라면서 며느리의 손을 꼭 잡았다. 곁에 있던 한 어르신이 “우리 교회에서 제일로 축복 받은 분이 이복희 집사님”이라며 “평소에 잘 해주는 거 많은데 칭찬을 그리 못하시느냐”고 했다.

조 목사는 고향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싶어도 가족이 곁에 없어 요양시설로 떠나는 어르신들을 위해 교회 인근에 노인복지시설을 세운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나중에 목회에 도움이 될까 해서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두었는데 농촌교회에 와서 이렇게 활용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노인복시시설을 짓기에 앞서 조 목사가 풀어야 할 과제는 소룡마을의 복음화다. 조 목사는 “주민 수는 얼마 안 되지만 한 마을 전체 주민이 크리스천이 돼 서로 품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강조했다.

조 목사가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 목사의 원래 꿈은 교사였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교회에 결석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그러다가 신앙적인 궁금함이 많이 생겼다”며 “그런 갈증을 풀어보려고 신학을 하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1988년 전북신학원을 나와 2007년 한신대신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성도가 30여명뿐인 척박한 농촌교회에서 어려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농촌교회에서 여성 목회자의 강점이 드러난다”고 답했다. 남성 목회자들이 잘 파악하지 못하는 가정 사정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어 주민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 작은 교회끼리 힘을 합치는 데서도 큰 힘을 얻고 있다고 했다. 함라면에 있는 4개 교단의 작은 교회 8곳은 정기적으로 연합예배를 드리고 체육대회도 여는 등 서로 협력하고 있다.

물론 조 목사는 주민들 간의 크고 작은 다툼 때문에 곤란한 입장에 놓였을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그의 가족이 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해줬다. 조 목사는 “익산에서 전광판을 만드는 남편뿐 아니라 전주에서 공부하는 딸과 아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찬양하고 기도해주는 덕분에 목회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목사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순간은 지난해 4월 열린 창립기념예배. 그는 “4월 5일 창립기념일을 앞두고 초대장을 각 가정에 보냈는데, 한두 분 빼고 다 오셔서 80명 정도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며 “교회를 안 나오시는 어른들도 교회에 큰 반감은 없는 것처럼 느껴져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내세울 게 없는 목사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면서 자주 묵상하는 성경말씀을 암송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 신목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출발할 경우 3시간 넘게 걸린다. 경부고속도로 대전 방면으로 가다가 천안분기점에서 천안논산간고속도로 논산 방면으로 갈아탄다. 연무IC에서 ‘강경’ 방면으로 우회전해 68번 국도를 타고 4㎞쯤 가서 산양사거리에서 23번 국도 ‘익산, 함열’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이어 덕용교차로에서 711번 지방도로 ‘군산, 함라’ 방면으로 진입한 뒤 신목교차로에서 722번 지방도로 ‘웅포’ 방면으로 우회전 해 800여m 이동한 뒤 좌회전한다. 소룡길을 따라 100여m 가면 좌측에 교회가 보인다.

익산=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