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빛과 어둠

입력 2012-12-21 18:34

얼마 전 이화여자대학 기독교학과의 양명수 교수님을 뵌 적이 있다. 양 교수님은 이화여자대학교회의 담임목사님이다. 교목실에 들어가서 소파에 앉는데 정면으로 빈 액자 두 개가 시선 높이에 들어왔다. ‘사진을 넣기에는 어색한 사이즈인데 뭐 하시려고 저기가 두었을까’라는 궁금함이 스쳐지나갔다. 잠자코 있었으면 체면은 구기지 않았을 것을 기어코 입을 열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교수님, 저 액자 두 개에는 무슨 사진을 넣어 두실 건가요.” 양 교수님은 “무슨 액자, 저거 말하는 건가. 어허, 이 사람 보게, 미술작품이 액자로 보이나 보군. 허허, 거 참”하시며 너털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빈 액자 두 개

“저게 작품이라고요. 어어, 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이왕 깨진 김에 갈 때까지 가보려는 심사로 벌떡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선 후 이 잡듯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옅은 노랑 기운의 바탕색 같은 것만 눈에 띌 뿐 아무 형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으으음, 이게 그림이라는 말씀이시죠. 으으음….” 양 교수님의 해설이 이어졌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벽지 같은데요’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빛이지, 천지창조 때의 그 시원(始原)의 빛, 추상화라네. 독일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부산에서 활동하는 화가 신사빈의 작품이지. 지금은 신학공부를 하고 있네.”

추상화라. 그것도 빛이 탄생하는 장면을 추상적으로 그린 것이라. 아름다움이 낯설었던 검은 도시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난 내가 빛의 추상을 이해하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하리라. 3세기 신학자 터툴리안은 예루살렘(신학)과 아테네(철학)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했지만 나는 질문을 바꾸어 태백과 예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곤 하였다. 청년 시절 고흐는 자진하여 탄광촌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내 고향 태백은 미술로부터 버림받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술이 버린 도시에서 태어났다 해도 그림을 놓고서 액자라고 한 건 너무하다.

어릴 적 반 친구 중에는 개울을 그린답시고 광산촌의 로고인양 검은 내(川)를 그려내는 경우도 있었다. 내 입장은 달라서 나는 현실이 검더라도 강물만큼은 검게 그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고집했고, 때문에 시험 삼아서라도 개울을 시꺼멓게 칠해 본 적이 없다. 당시 어린 나의 눈에는 광산촌임을 폭로하는 검은색 사실주의가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작년 여름 나는 고대 기독교 예술을 다루는 책을 어쭙잖게 출판하면서 저자 약력에 ‘강원도 태백 출생으로’라는 문구를 넣어야 할지 빼야 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나를 잉태한 석탄가루 날리던 검은 도시 태백이 내가 잉태한 천연색 사진 그득한 예술사와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밝은 것에 이끌리고 어두운 것을 거리낌은 누구나 그러하다. 하나님은 흑암을 밝히는 빛을 만드셨고(창 1장)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서 비치는 생명의 빛이 아니던가(요 1장). 최초의 기독교 예술이 조형해 낸 우주적 그리스도 역시 빛을 매개로 하였다. 반짝이는 별이 가득한 하늘은 우주를 상징한다. 그 우주의 중심에는 찬연히 빛을 내뿜는 황금색 십자가가 자리한다. 별빛의 바다인 우주, 그 밝고 아름다운 우주를 중심으로부터 압도하는 거대한 빛의 십자가, 초대교회는 이렇게 빛의 추상을 끌어들여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했던 것이다. 우주적 빛이든 내면의 빛이든 빛의 향연을 그려내려는 대개의 시도는 빛과 신성(神性)을 연결지었던 기독교적 전통에 기대어 있다. 그와 반대로 어둠은 고통과 악의 일반적 상징이다. 내가 태백에서 자라날 때 그곳에 대한 거리낌도 함께 자란 것은 그 공간을 지배했던 어두움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빛과 어둠에 대한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떠가고 있다. 4세기의 수도자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덕택이다. 그레고리오스는 기독자의 삶이 빛에서 시작되어 어둠 속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조명 받아 덧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영원한 것을 소망하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난 존재라 해도 인간은 여전히 피조물이어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간격이 무한하다(참조 롬 7:24). 내 언어와 내 경험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은 내가 아는 하나님일 뿐 하나님 자신일 리는 없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변증법

나라고 하는 유한한 존재가 무한하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레고리오스는 존재의 밤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내 자아를 비워 내면이 고요해지는 것이 존재의 밤이다. 내 견해가 잦아들고 내 개성도 사그라져 내 자아가 한 점 먼지처럼 없이 되는 것이 존재의 밤이다. 그런 존재의 어둠에 이르면 오히려 그리스도는 비어버린 나를 온통 당신으로 채우신다(갈 2:20). 찬란한 빛에서 시작하여 어두운 밤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이 기독자의 삶이라니 나는 이런 빛과 어둠의 변증법을 일찍이 알지 못했다(참조 시 74:16).

그런데 존재의 어두운 밤에 이르러 하나님을 가득 느끼는 신비한 삶은 어떤 그림이어야 담아낼 수 있을까.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