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박근혜와 아버지
입력 2012-12-20 18:44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는 독특한 보디랭귀지가 있다. 회의 중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문지르는 건 뭔가 말하기 곤란한 게 있을 때다. ‘부실한’ 오른손을 살짝 주무른다면 지금 듣고 있는 얘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다. 손목의 ‘라도(Rado)’ 시계를 빙글 돌리면 그 회의는 대충 끝내는 게 좋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는 사인이다. 앞으로 그를 상대할 공무원들에게 팁을 하나 더 드리자면, 그가 탁자 밑에서 갑자기 다리를 떨어도 놀라지 마시라. 이건 그냥 습관이다.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봤듯이 그는 달변(達辯)이 아니다. 다변(多辯)은 더더욱 아니다. 현안이 생기면 기자들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해오는데 그게 몇 문장 되지 않는다. 질문이 쏟아져도 “아까 다 말씀드렸잖아요” 할 뿐이다. 정치인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그의 정반대편에 문재인이 있다. 대선에 뛰어들자마자 “단일화하겠다”며 속내부터 드러낸 직설화법, 박 당선인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저런 보디랭귀지를 살펴가며 그 속을 가늠하려 했을까.
이번 대선에서 그의 심중(心中)을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낸 말은 김재원 의원이 했다. “박근혜가 정치하는 건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서다.” 이 취중 발언은 선거판에서 나온 얘기 중 제일 솔직해 보였다. 그러기에 과거사 논란을 그토록 어렵게 넘은 것일 테다. 선거운동의 마지막 메시지와 당선 일성이 ‘잘살아보세’인 걸 보면, 그의 마음속 가장 큰 자리는 누가 뭐래도 아버지가 차지한 듯하다. 청와대에서 자란 16년, 은둔에 가까운 20년, 그리고 독신….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이제 그가 아버지를 놓아줬으면 한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걸로 명예회복은 이뤄졌다고 자평했으면 좋겠다. 외신들은 일제히 ‘독재자의 딸’이라 했어도 국민은 그런 딸을 받아줬다. 더욱이 유신독재를 겪은 50∼60대가 일치단결해 지지를 보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닌가. 과거사 논란이 불거졌을 때 그는 수없이 “미래를 얘기하자” 했지만, 투표에 참여한 국민 절반은 그의 당선을 대한민국이 ‘뒤로 가는’ 길이라 여겼다. 이들을 아울러 약속한 통합을 이루려면 스스로 과거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박 당선인에게 과거는 곧 아버지다.
이를 위해 의사결정 방식부터 바꿨으면 한다. 중요한 결정은 결국 대통령의 몫이지만 그 과정은 어떤 대통령이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박 당선인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의견을 수렴하는 방법이 독특하다. A에게 자문을 구하고, B를 만나 얘기를 듣고, C의 보고서를 읽는다. A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B는 알 수가 없고, C가 그런 보고서를 냈다는 것조차 A와 B는 모를 때가 많다. A·B·C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는지 결정이 내려진 뒤에야 안다.
한 의원은 “박 당선인이 종종 전화로 이런저런 의견을 구하는데 어느 날부터 전화가 뜸해지다 두어 달 끊기면 그제야 의사결정 과정에서 내가 배제됐음을 알게 된다”고 했다. 이런 스타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 짙게 오버랩돼 있다. 수직적이고 제왕적이다. 아버지 시대의 청와대 생활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통해 몸에 뱄을지도 모른다. 이런 리더십으로 안철수의 새로움에 매료됐던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가 ‘박정희의 딸’에서 ‘대통령 박근혜’로 홀로 서기를 기대한다. ‘정치인 박근혜’에 성공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첫마디 ‘잘살아보세’는 아쉽다.
태원준 정치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