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진 (3) 말썽쟁이 골목대장에게도 4代 기독집안의 피는…

입력 2012-12-20 18:38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우리 쪽은 30여명. 상대는 40∼50명쯤 돼 보였다. 게다가 저쪽 대장은 힘깨나 쓰게 보였다.

“야, 한 동네에서 이렇게 두 패로 나뉘어서 지낼 순 없어. 내 밑으로 들어오지?” 숫자도 부족한 데다 자칫 패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영락없이 지겠다 싶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휙 휙’ 지나갔다. “이렇게 하자. 너랑 나랑 단둘이서 칼싸움, 벽돌 깨기, 씨름, 이렇게 세 가지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 편으로 들어가는 거야. 어때?”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새를 키운다고 서울 필동에서 일제강점기에 경성목장 자리였던 홍제동 집으로 이사 왔다. 동네 한편에는 중산층들이, 다른 편에는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우리 집은 그 가운데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매일 인왕산으로, 안산으로 놀러 다녔다. 생활이 좀 어려운 친구들이었다. 인왕산에 있는 조그만 동굴에서 친구들과 거적을 덮고 잔 적도 있다. 함께 다니는 친구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자 다른 패거리가 좋지 않게 본 모양이었다. 결국 대결 아닌 대결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대일. 이제 씨름으로 결정하는 거다.” 양 패거리의 시선은 두 우두머리에게 쏠렸다. 지는 쪽이 굽히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허리춤을 잡고 이리저리 힘을 써봤다.

‘이겨야 해. 내가 대장이 되는 거잖아.’ 쉽진 않았지만 상대는 내 기술에 넘어갔다. 느낌이 좀 이상했다. 왠지 져주는 느낌이었다.

“나 임영진이야.” 멋쩍은 느낌이 있었지만 어찌됐든 이겼기에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상대도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난 김성준이라고 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우리는 신나게 놀러 다녔다. 다른 동네 아이들과도 많이 싸웠다. 힘을 써야 하는 상황이면 부대장인 성준이가 앞장을 섰다. 나는 대장이지만 주로 책사 역할을 했다.

남산초등학교를 3년 다니다가 안산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교가 가까워졌으니 시간은 훨씬 더 많이 남았다. 더 열심히 놀러 다녔다. 학교 성적은 좋을 리 없었다. 경성사범학교를 나온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인왕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회초리를 맞으면서 공부했다. 성적은 올랐다. 전교 1등도 했다.

성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5학년 2학기가 되자 어머니는 나를 수송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다른 학교보다 한 학기 빠른 교과 진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첫 시험부터 망쳤다. 아들을 둔 거의 모든 가정의 목표였던 경기중학교 진학은 힘들게 됐다.

어머니는 차선인 다른 학교보다 배재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했다. 외가는 4대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성적이 안 된다면 기독교 신앙이라도 제대로 갖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놀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어머니를 따라 교회도 열심히 나갔다. 교회 종 치는 일도 담당했다. 주일학교 반사도 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을 교회에 데려가 동전을 쥐어주며 요절을 외우게 했다. 어머니에게 잘 보여야 성준이를 비롯한 친구들과 한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준이와 만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더구나 성준이는 다른 중학교에 진학했다. 늘 붙어 다녔던 친구를 못 만나는 게 슬펐다. 형편이 어려웠던 성준이는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집을 나가 버렸다. 아예 볼 수도 없게 돼 버린 것이다. 성준이에 대한 여러 가지 안 좋은 소문이 들렸다. 안타까웠다. 보지는 못했지만 성준이는 내 생일이 되면 내 방 창문 틀에 편지와 함께 선물을 놓고 가곤 했다.

정리=전재우 기자 jw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