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늘어진 어깨 슬픈 아버지의 초상… KBS 2TV ‘내 딸 서영이’

입력 2012-12-20 18:33


1997년 외환위기가 몰고 온 칼바람은 매서웠다. 전국 곳곳에서 정리해고의 살풍경이 펼쳐졌고, 중소규모 사업체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많은 ‘아버지’들은 비참한 현실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KBS 2TV 주말극 ‘내 딸 서영이’의 이삼재(천호재)도 그런 아버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IMF 시절’ 다니던 회사가 망했고, 이후 재기를 꿈꿨지만 쉽지 않았다. ‘삼재’라는 이름처럼 무슨 일을 하건 불운이 따라붙었다. 이중계약 사기를 당했고, 도박과 경마에 빠져 딸 대학 등록금을 날리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외환위기의 절망을 경험한 아버지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는 아이콘 중 하나일 것이다. TV 평론가 김선영씨는 “삼재의 비극이 ‘IMF 시절’부터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90년대 외환위기 때 설 곳을 잃었던 아버지 세대들, 이들은 현재 ‘고령화 시대’를 맞은 우리 사회에서 또 다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어요. ‘내 딸 서영이’는 삼재를 통해 그런 아버지들의 현실을 조명하고 있는 셈이죠.”

#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초상

지난 9월 첫 방송된 ‘내 딸 서영이’가 시청률 30%를 넘나들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국민 드라마’로 통한 전작 ‘넝쿨째 굴러온 당신(넝굴당)’의 바통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은 것이다.

특히 이 드라마는 그간의 주말극과는 달리 아버지의 자리를 비중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작품에서는 삼재 외에도 다양한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예컨대 서영이의 시아버지이자 대기업 오너인 강기범(최정우)은 가부장의 전형이다. 아내는 등한시하고 사업의 번창과 아들의 기업 승계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 강기범의 고교 동창인 최민석(홍요섭)은 가장의 권위는 찾아볼 수 없는 소외된 아버지상을 대표한다. 회사에서도 ‘낙하산’이라는 비아냥거림에 시달리던 그는 최근 사표를 내고 뒤늦게 배우의 꿈을 좇고 있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주말극은 가족의 모습을 과장되게 풀어내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 주변의 가족상을 현실감 있게 묘사해낸다”며 “특히 한동안 드라마에선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특이한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오랜만에 나온 ‘아버지 드라마’에 시청자 반응도 좋다. 시청자 게시판에서는 이 작품을 통해 아버지의 그늘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는 내용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 네티즌은 “삼재씨 모습을 보면 이 시대 아빠의 모습이에요. 나의 모습 같기도 하네요”라고 적었고, 또 다른 네티즌은 “이제껏 다른 드라마들은 엄마에 대해 많은 걸 보여줬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네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 주말극 문법을 뒤엎다

‘내 딸 서영이’는 애끊는 부정(父情)과 무너진 부권(父權)을 다루는 동시에 천륜을 거스른 딸 서영(이보영)의 삶을 그리는 작품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어머니의 죽음, 때마침 찾아온 재벌가 아들과의 사랑…. 서영은 결혼 승낙을 받기 전, 남자의 부모 앞에서 누추한 개인사를 보이고 싶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짓말을 하고 만다. 총 50부작으로 지난 16일 28회가 방송된 이 작품은 요즘 거짓말을 한 서영이가 겪는 혼란과, 아내의 ‘진실’을 알게 된 남편의 충격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같은 스토리는 KBS 주말극이 그간 보여준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수상한 삼형제’ ‘사랑을 믿어요’ ‘오작교 형제들’ ‘넝굴당’ 같은 전작들은 가족 구성원들의 좌충우돌 일상을 가볍고 때론 코믹하게 그려내는 ‘주말극의 공식’을 따라왔다.

드라마평론가 신주진씨는 “한동안 트렌디한 드라마가 ‘대세’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KBS2) ‘보고 싶다’(MBC) 등 정통 멜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며 “정극 분위기가 강한 이 작품의 인기 역시 (정통 드라마가 관심을 받는) 요즘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방송 초반 속도감 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최근 들어 느슨해지면서 작품에서 예전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영이가 3년 넘게 아버지의 존재를 남편과 시댁에 말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