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상온] 노인의 반란
입력 2012-12-20 18:26
몇 년 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SF 중 ‘노인의 전쟁(Old Man’s War)’이란 게 있다. 요즘엔 SF를 보통 과학소설로 번역하지만 2005년에 출간된 존 스칼지의 이 작품은 옛날식으로 ‘공상’과학소설이라야 맞다. 살 만큼 산 노인들이 젊은 새 몸을 부여받은 뒤 군인이 돼 우주식민지 쟁탈전에 투입된다는 줄거리니까.
비록 공상이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그럴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을 얼마 살아보지도 못한, 인생을 꽃피워보지도 못한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 목숨을 잃게 하느니 한세상 잘 살아 온 노인들의 신체를 다시 젊은이로 되돌려 군인으로 만들면 전장에 나가 죽는다 한들 ‘진짜 청년’들처럼 아쉬울 것도, 애달플 것도 없지 않을까 해서다. 게다가 활력 넘치는 젊은 몸에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노인의 두뇌가 결합된다면 그만큼 전투에서도 유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경험 부족과 치기(稚氣) 등에서 비롯된 시행착오는 겪지 않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하나의 종(種)으로서 인간에게 청년과 노년은 모두 필요하다. 단적인 예로 젊음의 진취성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무모함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노년의 조심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의 인간사회에서는 노인은 불필요한 잉여인간이고, 젊음만이 우대받는 ‘청년만능’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노인은 과연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젊은이들이 피땀 흘려 부양해야 할 성가신 존재이기만 한 것일까. 노인을 공경하는 유교적 전통이 전혀 없어 젊음을 거의 광적으로 숭배하는 구미의 경우에도 노인을 아주 불필요한 존재로만 인식하지는 않는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흰 수염 휘날리는 간달프가 반지원정대의 중심을 잡아주고, 스머프 동네에서도 파파 스머프가 조정자 역할을 한다. 심지어 ‘스타 워즈’에서도 미숙한 젊은 영웅 루크 스카이워커 옆에는 지혜로운 늙은 요다가 있다.
이처럼 청년과 노년의 조화가 필요함에도 하도 천대를 받다보니 노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난 노심(老心). 투표율이 높으면 젊은층이 대거 투표에 참여한 것이고, 이는 문재인 후보에게 유리할 것이라던 추측은 빗나갔다. 높은 투표율의 상당 부분은 50대 이상 장·노년층 덕분이었고, 이들은 야당을 지지한 젊은이들의 성향에 맞서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이러다가 앞으로 지역감정이 아니라 세대감정이 ‘망국병’이라고 지탄받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