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대 개막] 대통령 되기까지

입력 2012-12-20 03:02

“박정희의 딸이 민주국가 대통령을 할 수 있느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일 이 기나긴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산업화를 이뤘지만 민주화에 역행했던,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대통령의 딸에게 국민은 기회를 줬다. 청와대가 집이었던 16년, 세상의 눈에서 벗어난 20년, 그리고 정치판에 뛰어든 15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세월을 지나 그는 다시 청와대로 간다. 2007년 첫 대권 도전에 실패하고 깨끗이 승복했다. 5년간 절치부심 끝에 ‘국민대통합’을 내걸고 다시 나왔다. 지난 7월 두 번째 도전을 시작하며 “국민 모두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 한 명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유권자가 보수와 진보로 가장 극명하게 갈린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합을 내세운 그에게 국민은 기회와 함께 ‘숙제’를 줬다. 독재자의 딸, 퍼스트레이디, 원칙과 신뢰, 선거의 여왕, 준비된 여성 대통령….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은 그에게 많은 수식어를 안겨줬다. 5년 뒤 추가될 다음 수식어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군인의 딸서 퍼스트레이디 대행

◇청와대로 간 군인의 딸=1952년 2월 2일 대구 삼덕동에서 군인이던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평범했고 그래서 행복한 시절이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를 가족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아내에겐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고 기억한다. 육 여사를 이상적 여성상으로 꼽을 만큼 어머니의 모든 것을 존경하고 따랐다.

2007년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싫은 점도 더러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래된 군복 바지를 줄여서 내게 바지를 만들어 입히곤 하셨다. 깡총 짧게 자른 바가지 머리에 국방색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은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참 촌스러웠다. 나는 그 바지를 입는 게 너무 싫었다. 안 입겠다고 떼를 써보았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어머니에게 옷 투정이 통할 리 없었다.”

1961년 육군 제2군 부사령관이던 아버지가 주도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그가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는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부녀간의 대화 자리를 에둘러 마련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간 것은 기억나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니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군사쿠데타 성공 뒤 서울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 머물던 박 당선인은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는 청와대를 ‘방이 많고 마당이 넓은 집’으로 기억했다. 대통령의 자녀지만 평범하게 키우고 싶었던 육 여사의 교육 덕에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충초등학교를 거쳐 성심여중과 성심여고를 다녔다. 동창들은 박 당선인을 전형적인 ‘범생이(모범생)’에다 ‘엄친 딸’로 기억했다. 그는 결석이나 지각 없이 개근했고 6년간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으로서 이례적으로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유신과 긴급조치로 대학 내 반정부 분위기가 고조되며 데모가 들끓을 때 학업에만 매진했다. 4년 평점 평균 4.0 만점에 3.82점을 기록하며 수석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생활 6개월이 지날 무렵인 1974년 8월 15일 그의 삶에 첫 비극이 찾아온다. 육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대사관에서 연락을 받고 급거 귀국길에 올라 공항 뉴스 가판대에서 육 여사 ‘암살’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온몸에 수만 볼트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육 여사 영결식 뒤에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보며 자신을 추슬러야 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고 했다.

◇퍼스트레이디 대행=박 당선인은 육 여사 장례식을 치른 뒤 일주일도 안돼 청와대 안주인 역할을 맡았다. 22세였다. 19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6년간 청와대에서 권력의 핵심부를 목격했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 그의 첫 일정이었다. 그는 1974년 11월 10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 이왕 공인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그는 육 여사가 하던 일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았고, 영세한 기업과 어렵고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청와대에 들어온 수백 건의 민원을 점검하고 확인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면 수행하곤 했다. 또 아침마다 신문을 읽으며 주요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외국에서 귀빈이 오면 이를 접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내외 방문 때 박 당선인은 카터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에게 조깅을 화제 삼아 주한미군 철수는 안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저녁 만찬에서 카터 대통령이 아내에게 들었다며 주한미군 문제를 계속 질문해 ‘근혜-카터 회담’이란 말까지 나왔다고 그는 회고했다.

박 당선인은 육 여사 사망 이후 자주 아팠다고 한다. 무료진료소를 다니며 의료보험제도 정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1976년 12월 성결교 서울신학대학 건물에 야간병원을 열었고 이는 1979년 ‘새마음병원’으로 재탄생했다. 그는 의료보험제도에 관심을 갖고 박 전 대통령을 설득했다. 1976년 의료보험법이 개정되고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됐을 때 그는 “의료보험제도 도입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는 복지 선진국으로 가는 첫 신호탄이었다. 퍼스트레이디로 있는 동안 내가 공을 들이고 열과 성을 다한 일이었으므로 내게도 큰 보람이었다”고 회고했다.

1979년 10월 26일 두 번째 비극이 벌어졌다. 그날 아침 삽교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한다고 나간 박 전 대통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1시30분 김계원 비서실장이 관저로 찾아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서거 사실을 전했다. 박 당선인의 첫마디는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였다. 9일간 국장을 치렀다. “이유 없이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 상복을 걷어보니 팔 전체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부황이라도 뜬 것처럼 큰 멍 자국이 어깨부터 다리까지 뒤덮었다. 의무실에 들렀더니 의사는 ‘갑자기 너무 큰 충격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 피가 몰려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설명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적었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지 못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치면서 그는 그날 핏물이 가시지 않는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시련의 나날… 명예회복 나서

◇배신과 고통의 시간=1979년 11월 21일 박 당선인은 지만, 근영 두 동생과 서울 신당동 옛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를 첩첩산중에 버려진 상황에 비유할 정도로 막막함과 외로움은 컸다. 그해 연말에 만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대통령 집무실 금고에서 찾았다며 6억원을 건넸다. 박 당선인은 지난 4일 첫 TV토론에서 “아버지도 그렇게 흉탄에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하고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받았다. 나중에 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1982년 8월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300평 규모의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 회장은 “두 분 유품을 보관할 장소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한다. 박 당선인은 2년 뒤 이 집을 팔아 장충동에 집을 샀고, 1990년 다시 그 집을 팔고 현재 삼성동 자택으로 이사했다. 신 회장과 약혼설도 있었지만 박 당선인은 부인했다. 여성 정치인에게 민감한 결혼과 관련해 박 당선인은 “내 인생에 그럴 듯한 연애 한 번 없었다. 결혼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답하곤 했다.

1979년부터 정치입문을 한 1998년까지는 대중들 시야에서 박 당선인이 사라진 시간이다. 그의 일기집과 몇몇 인터뷰 기록 외에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박 당선인은 “나는 지금도 18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웃음이 나온다”고 적을 정도로 이 시간을 치열하게 보냈다.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지우기’에 열을 올렸다. 1980년 5·17 조치 이후 그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은 강제 해산됐고, 영남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7개월 만에 물러났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식도 허용되지 않았다. 국립묘지에서 첫 추도식이 열린 것은 1987년이었다. 사실상 연금 상태와 다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1982년 10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활동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이따금 몇몇 언론인과 장충동 테니스장에서 만나 운동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 외부 활동의 전부였다.

아버지를 도왔던 이들의 배신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죽음에서 시작된 박 당선인의 트라우마는 더 깊어졌다. 정인숙 사건 등 아버지와 관련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할 정도로 언론과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일기집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에는 배신감과 불신의 괴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81년 8월 14일 일기에는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약한 인간이기에 차츰차츰 권세와 명예와 돈을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성실성이 훌륭하여 믿음이 간다 해도 그가 과연 얼마 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사실에 서글픔을 금치 못한다”고 적혀 있다. 이때 가졌던 마음은 ‘신뢰를 최우선’으로, ‘배신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박 당선인 특유의 용인술 토대가 됐다. 당시 박 당선인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1981년엔 예장신학대학원에 등록해 한 학기를 다녔고, 법구경 금강경 등 불교 경전도 읽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9주기를 기해 ‘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및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듬해 박 전 대통령 10주기 행사를 치렀다. 1990년 아버지 일대기를 다룬 책 ‘겨레의 지도자’를 출간했고,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하며 박정희 재평가 작업에 몰두했다.

1989년엔 최태민 목사와 육 여사를 추모하는 단체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 이는 최 목사와 1976년 만들었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으로 불렸다. 지역 조직을 토대로 한때 전국적으로 회원이 70만명에 이를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단체의 소식지인 ‘근화보’는 ‘독재자 박정희’라는 세간의 평가에 맞서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창구로 활용했다. 10·26 이후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를 가지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9년 12월 30일 일기에서 박 당선인은 80년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89년은 감사하고도 잊혀질 수 없는 해, 수년간 맺혔던 한(恨)을 풀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한 해였다. 아버지에 대한, 그 시절 역사에 대한 왜곡이 85% 정도 벗겨졌다고들 말한다. 뜻깊은 마감으로 80년대 자체도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80년대는 마음의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두 번 다시 돌아보기도 싫은 소름끼치는 연대로 느껴진다.”

그는 1990년 11월 최태민 전횡설로 촉발된 육영재단 사태를 겪으면서 다시 언론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근영씨와의 갈등이 준 충격은 컸다고 한다. 이후 그는 독서와 외국어 공부, 지방 곳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최태민과의 연관설이 불거질 때마다 그는 “어머니 사후 위로하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때 인연이 돼 만난 분 중 한 분이다. 이후 부모님 기념사업회 일 등 제가 어려운 시절에 도와주셨다”고 말해왔다. 각종 의혹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부인했다.

정계 입문 권유가 끊이지 않았다. 결심을 굳힌 건 1997년 외환위기가 들이닥치면서다. 그는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무너질 수가 있는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고, 중산층이 노숙자가 되고, 기업이 도산하는 사태를 보면서 다시 나라가 반석에 올라서는 데 제가 일조를 하지 않는다면 굉장히 자책할 것 같아 용기를 내 정치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해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이회창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돼 지원 유세에 나섰다. 다음 해 이른바 ‘달성대첩’으로 불리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모두 질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승리했다.

원칙·신뢰 정치로 지지 받아

◇‘정치 왕따’에서 ‘선거의 여왕’으로=한나라당에 발을 들인 박 당선인은 2000년 전당대회에 출마했다. ‘가만있으면 여성 몫의 지명직 부총재가 될 수 있는데 왜 나가느냐’는 당내 여론에 그는 “여성이라 보호받고 특혜를 누리는 것은 내 정치적 소신과 맞지 않는다”며 출마를 감행, 2위로 당선됐다. 여성이지만, 통상적인 여성 정치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이후 제왕적 총재직 폐지 등 각종 정치 쇄신, 혁신안을 내놓으며 이회창 총재와 대립했다. 당내 ‘왕따’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를 바라보는 당내 시선은 곱지 않았다. 2002년 2월 이 총재와 당이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는 계속됐다. 그해 5월 북한을 방문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내준 특별기를 타고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2박3일 머무는 동안 단독 회담을 가졌고, 들어올 때는 김 위원장 배려로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들어왔다. 그때 경험으로 남북 간 상호 신뢰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이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근간이 됐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11월 19일 한나라당과 합당해 이회창 후보를 지원했다. 대선 패배 이후 ‘차떼기’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내리막을 걷던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정점으로 좌초 위기에 처했다. 그는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다들 만류하는 당내 경선에 출마, 보수정당 첫 여성 대표가 됐다. 여의도 공터 ‘천막당사’도 그의 구상이었다. 당 대표 임기 첫날 그는 명동성당으로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조계사에서 108배를 한 데 이어 영락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해 반성의 기도를 올렸다. 한 당직자는 “첫날 일정이지만 우리가 짜면서도 과연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모두 하겠다고 하더니 일정을 소화했다”고 말했다. 이후 총선 때까지 그는 2∼3시간씩 쪽잠을 자고 손이 부르트도록 악수를 하며 선거 지원 유세를 다녔다. 총선 방송 연설에선 ‘눈물을 흘리며’ 한나라당의 과오를 사죄했다. 50석도 어려우리라던 예상과 달리 ‘121석’을 거둬들이며 난파 위기의 한나라당을 구했다. 재·보궐 선거까지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2년3개월 야당 대표로 있는 동안 여당 대표 8명을 갈아 치웠다. ‘박 다르크’, ‘구원투수’란 호칭과 함께 ‘선거의 여왕’이란 닉네임이 생겼다. 그는 한나라당 부패 청산을 위해 천안 중앙연수원을 헌납했고, 야당에 맞서 사학법 장외 투쟁을 이끌며 강한 리더십을 보였다. 아울러 각종 선거 공약의 이행 결과를 수록하는 약속 이행집을 만들며 ‘약속과 신뢰’의 정치를 강조했다.

◇두 번째 인생, 두 번째 도전=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 신촌에서 유세를 하던 중 커터칼 테러를 당했다. 얼굴 오른쪽의 11㎝의 긴 흉터가 그때 생겼다. 의사들은 5㎜만 더 찔렸더라도 경동맥을 스치며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했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깜짝 놀란 비서실장에게 “많이 놀라셨죠”라고 위로했다. 또 수술 직후 “선거를 차질 없이 치러야 한다. 정치적으로 오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주문하는 대담한 면모를 드러냈다. 병석에서 내놓은 “대전은요?”라는 말 한마디로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한마디 정치’의 시작이었다.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 선물과 성원이 답지했다. 박 당선인은 평생 기억에 남는 선물로 그 때 받은 선물들을 꼽았다. 60대 일용직 노동자가 주고 간 우유 4팩, 어떤 남성이 몸에 좋다고 길어온 약수, 당원들이 접어 보낸 종이학 등이었다. 그는 이때 이후의 삶을 ‘하늘이 내게 주신 덤’으로 생각하고 산다고 했다.

당 대표를 내놓은 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격돌했다. 사실상의 대선과 다름없는 경선에서 2000여표 차로 아깝게 졌다. 사람들은 경선 승복이 쉽지 않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그는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 잊어버립시다”라며 정치사에 유례없는 승복 연설을 남겼다.

그해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승리하고, 박 후보를 향해 ‘국정 동반자’란 표현을 쓰며 관계 개선을 시사했다. 그럼에도 친(親)이명박계와 친(親)박근혜계의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박 당선인은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다. 친박 의원들은 친박연대를 만들거나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돼 18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 박 당선인의 ‘부작위의 정치’가 시작됐다. 언론 접촉을 자제하고 대외 활동도 줄였다. 전문가 집단을 만나 정책과 현안에 대한 공부를 하며 조용히 지냈다.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미디어법과 세종시법 처리 과정에서 박 당선인은 이 대통령과 정면충돌했다. 특히 세종시법 처리 때는 측근들이 모두 말리는데도 기어이 본회의장에서 반대 발언을 했다. 그는 나중에 기자들에게 “언론에선 이 대통령과 싸운다고 하는데 전 싸운 적이 없다. 미디어법이나 세종시법 처리 과정은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로 당이 흔들리자 12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다시 전면에 나섰다.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이슈를 선점했다. 크게 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지난 7월 두 번째 대선 길에 나섰다. 김문수 경기지사, 안상수 전 인천시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김태호 의원 등과 벌인 두 번째 경선에서 84%의 역대 최고 지지를 받으며 후보로 확정됐다. 이후 인혁당과 관련해 ‘두 개의 판결’ 발언과 ‘정수장학회’ 논란 등 과거사 고비를 돌파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야권의 단일화 실패로 ‘안철수 바람’이 가신 뒤에는 네거티브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선거 막판까지 ‘깜짝쇼’나 ‘정치 이벤트’ 없이 국민만 바라보며 뚜벅뚜벅 민생 행보를 계속했다. 박근혜식 캠페인으로 자기만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