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012] 서울, 위안부 할머니들 “부끄럽지 않은 후손돼야…” 한표
입력 2012-12-19 20:12
새 대통령을 뽑는 19일 전국 대부분이 영하권에 머문 추운 날씨였지만 1만3542개 투표소는 참정권을 행사하려는 유권자들의 ‘기꺼운’ 줄서기가 투표 마감까지 이어졌다. 100세가 넘은 어르신과 위안부 할머니들, 몸이 불편한 장애인, 생애 첫 투표권을 갖게 된 만 19세 새내기 유권자,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결혼이주여성과 북한이탈주민까지 시대가 원하는 ‘좋은’ 대통령이 선출되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행사했다.
이순덕(95) 김복동(87) 길원옥(85)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쉼터 ‘우리집’에서 생활하는 위안부 할머니 3명은 19일 오전 10시50분쯤 서울 연남동 경성고등학교에서 투표를 했다. 투표 대기 줄이 긴 탓에 25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고령에 거동까지 불편한 할머니들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기표소로 들어갔다. 길 할머니는 “오늘이 윤봉길 의사 순국 80주기인데 투표율도 80%는 나와야 하지 않겠나”라며 “젊은이들이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주름이 가득한 손등에 기표 도장을 찍어 인증사진으로 남겼다. 할머니들은 정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희망승합차’에 올랐다.
중증 장애인들과 고령자들도 투표 행렬에 동참했다. 시각장애인 이광호(48)씨는 오전 6시50분쯤 명동주민센터에서 안내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투표권을 행사했다. 투표용지와 시각장애인용 점자용지를 받아든 이씨는 5분여간 어렵게 투표를 마친 뒤 “시각장애인용 투표용지에 칸이 좁아 도장을 맞춰 찍기가 너무 어렵다”며 잠시 항의하기도 했다. 선천성 소아마비 장애인인 김재원(40)씨도 오전 9시20분쯤 논현2문화센터를 찾았다. 김씨는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전동휠체어를 몰고 오느라 손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는 “날씨가 춥고 이동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나도 대한민국 국민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투표하러 왔다”며 “새 대통령에겐 무엇보다 장애인 복지 확대를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105세의 권영화 할머니는 오전 9시쯤 손자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상도동 강남초등학교 투표소에서 투표했다. 권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있긴 하지만 선거 때마다 아침에 나와 꼭 투표를 하고 있다”고 했다. 투표장에 있던 주민들은 권 할머니를 보고 “할매 오셨소”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태원1동 청화아파트 경로당에 마련된 투표소를 찾은 김명수(73) 할머니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힘든데 새로운 대통령은 젊은 사람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서울종합방재센터에 따르면 오후 2시까지 고령이거나 몸이 불편한 유권자 17명이 119구급대의 투표소 이송 지원을 받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가장 먼저 투표를 하기 위해 엄동설한에서 노숙을 한 30대 시민도 있었다. 삼청동주민센터 투표소 대기 줄의 가장 앞에 있던 김선진(35)씨는 “전국에서 1등으로 투표를 하려고 오전 1시30분부터 투표소 앞에서 밤을 샜다”고 말했다. 고무매트와 침낭, 이동식 난로까지 챙겨 온 김씨는 “대부분 선거에서 어르신들만 일찍 나오고 젊은이들은 늦게 오거나 아예 투표를 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젊은층의 한 사람으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취업준비생 박모(25)씨는 1등으로 투표하겠다는 생각에 전날 밤 집에 들어가지 않고 오전 5시30분쯤 삼성동 제1투표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간 투표소를 찾은 조남길(71)씨 부부와 맞닥뜨렸다. 박씨와 조씨는 서로 “내가 먼저”라고 주장하다 결국 나이 어린 박씨가 양보해 조씨가 먼저 투표한 뒤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논현2문화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는 단국대 음대생들로 구성된 목관 5중주 앙상블 클래식 연주회가 열려 차가운 투표장 분위기를 훈훈하게 덥혀줬다. 서울 강남구 선거관리위원회가 ‘밝은 투표소’ 사업의 하나로 기획했다.
이날 서울 지역은 낮에도 영하권을 벗어나지 않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날씨가 변수가 될 것이란 전망은 기우에 불과했다. 많은 투표소에서 대기 줄이 수십m씩 늘어설 정도로 투표 열기가 뜨거웠고, 가족 단위로 투표장을 찾은 유권자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오전 9시40분쯤 상도동 강남초등학교에서 만난 허성민(34)씨 부부는 두 살배기 딸과 함께 투표장을 찾았다. 허씨는 “지난 총선에 이어 두 번째로 딸을 데리고 투표하러 왔다”면서 “민주시민이라면 선거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딸에게 가르치고 싶었다”고 했다.
난곡동 제3투표소에서 투표한 정병훈(45)씨는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투표해 왔는데 이렇게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하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한편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들이 서울 30여곳을 비롯해 전국 투표소 약 100곳에서 청소년 투표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호일 전웅빈 정현수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