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진 (1) “하나님, 내게 힘을…” 기도로 생명 살릴 칼을 들다
입력 2012-12-18 18:27
“어머니, 한 번 더 수술을 하시죠.”
“무슨 말씀이세요? 내 딸에게 더 이상 손대지 마세요. 벌써 8번이나 수술을 했잖아요. 어떻게 더 칼을 대요. 이제 포기할래요. 저 이 아이 편안하게 보내 주고 싶어요. 못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두 살도 안 된 영아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긴 했다. 수차례의 수술에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보호자가 힘들만도 했다. 그렇다고 수술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내겐 이 아이를 살려야만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은가.
1987년 가을 무렵의 일이었다. 뇌수두증을 앓고 있는 영아가 입원했다. 뇌척수액을 내보내는 관이 막혀있는 경우였다. 선천적이었다. 뇌는 하루 500㏄ 정도의 뇌척수액을 생성한다. 이 액은 척수까지 순환하면서 영양분을 공급한다. 뇌에서 척수로 내려가는 관인 뇌척수액로(路)가 막힐 때 뇌수두증이 생긴다. 뇌척수액이 많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뇌척수액이 많아지면 뇌실이 커지고 뇌압이 올라가 두통, 구토, 행동 장애, 기억력 상실, 보행 장애, 동안 신경마비로 인한 사시, 두개골이 얇아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급성으로 진행되면 의식저하가 오기도 하고, 심하면 사망하기도 한다. 성인에게 발생하기도 한다. 주로 단락 수술(shunt)로 치료한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예후에 많은 요인이 작용한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방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뇌압을 빨리 낮추기 위해 뇌 밖으로 물을 빼내는 단순한 방법도 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염증이라도 생기면 아예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 일반적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인 뇌실에서 복강(배)까지 얇은 관을 피부 밑으로 넣어 뇌척수액이 빠지도록 했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힘드시겠지만 결정하셔야 합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보낼 순 없습니다. 의사인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 아이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수술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 수술 후에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저도 어머니 말을 따르겠습니다.”
병증에 대한 의사의 정확한 판단은 중요하다. 치료 방법에 대해 성심성의껏 설명하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신뢰와 확신을 주는 일은 더 중요하다.
결국 보호자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목에 있는 작은 정맥, 경정맥을 찾아 관을 넣어 심장까지 연결해 뇌척수액을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 판단과 시술은 모두 생명과 직결돼 있다. 1㎜의 오차도 허용돼선 안 된다. “영진아, 수술하기 전에 꼭 기도해야 한다. 자만에 빠지면 안 된다. 항상 하나님께 네 손을 맡겨라.” 어머니와 할머니의 당부가 생각났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손을 닦으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내게 힘을 주십시오. 이 어린 생명이 자신의 삶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께 맡깁니다.”
수술 자국이 가득한 아이의 배가 눈에 선했다. 여덟 번의 수술을 견뎌냈을 작은 몸이 안타까웠다. ‘이번에도 잘 견뎌내고 꼭 나아야 한다. 아이야.’
나는 다시 메스를 잡았다.
◇약력 =1953년 서울 출생, 현 경희의료원장 겸 경희대병원장, 정동제일교회 장로, 경희대 의대 졸업(10회), 스웨덴 카로린스카 대학병원 연구원, 대한신경외과학회 차기 이사장, 현 대한의사협회 고문, 현 대한병원협회 학술위원장, 현 아시아감마나이프학회 한국대표, 대한정위기능신경외과학회장, 대한감마나이프학회장, 대한축구협회 의무분과위원회 위원 및 국가대표팀 팀 닥터, 2009 세계의사월드컵 한국팀 감독, 현 대한의사축구연맹 회장
정리=전재우 기자 jw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