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성기철] ‘묻지마 투표’ 이제 그만
입력 2012-12-17 21:34
몸이 불편해 보름 전부터 경기도 일산 우리 집에 와 계신 장인어른이 투표하러 대구에 다녀오시겠단다. 딸과 사위가 “건강도 안 좋으시고 날씨가 엄청 춥다는데 천리 길을 가실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린 건 당연지사. 하지만 80대 중반 노인은 “내 평생 투표 안 한 적 한 번도 없어. 주중에는 KTX 노인 요금이 30% 할인되기 때문에 5만원 정도면 갔다 올 수 있어”라며 막지 말라고 하신다. 투표는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말씀에 입을 다물 수밖에.
평소 정치적 성향에 비춰볼 때 장인어른은 ‘박근혜 표’가 거의 확실하다. 장인어른의 대구행 결심은 그곳에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표가 강하게 결집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대구만 그럴까. 선거 때마다 대구의 지역적 대척점이었던 광주에서도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표가 쏠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선거법상 공표 여론조사 마지막날인 지난 12일 주요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한 지지도 조사에 따르면 대구에서 문 후보 18.9%, 광주에서 박 후보 6.8%를 기록했다.
대구·광주에서 몰표 조짐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로 끝나고 말 것인가.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대구와 광주의 ‘묻지마 투표’는 이번 대선에서도 재연될 조짐이다. 1987년 대선 직선제 부활 이후 줄곧 이어져 온 지역 몰표 행태를 말한다. 다섯 번 치러진 대선에서 대구의 경우 1997년 김대중(12.53%), 2002년 노무현(18.67%) 후보를 제외하면 진보정당 후보 득표율은 10%를 한참 밑돌았다. 광주에선 보수정당 후보가 단 한 번도 10%의 벽을 넘지 못했다.
과거의 지역편향 투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대구·경북(TK) 출신의 수십년 집권자들과 호남 출신의 걸출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맞대결이 주요 선거를 좌지우지했고, 이후 선거에서도 그 영향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대구 유권자들의 경우 자기 지역에서 14년간 국회의원을 지낸 박 후보에 대한 애정이 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문 후보를 매정하게 내칠 이유는 없다. 두 후보의 공약에 큰 차이가 없고, 지역정서를 따지더라도 문 후보는 호남이 아닌 경남 거제 출신이다. 억센 경상도 억양을 갖고 있다. 문 후보가 대통합 내각 구성과 증오의 정치 청산을 부르짖고 있는 걸 보면 박 후보한테 몰표를 던질 일은 아닌 것 같다. 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80-80운동(80% 이상 투표와 박근혜 80% 이상 득표)은 타 지역 유권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광주도 마찬가지다. 정치사적으로 아픔을 안고 있는 곳이긴 하나 보수정당 후보에게 10%도 안 준다는 것은 옹졸하다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에게 피해의식을 가진 유권자들로서 진보정당 후보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몰표를 던지는 것은 수치다. 박 후보의 경우 열 자식 안 굶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脫지역 투표로 정치혁명을
대선 후보들이 주창하는 정치혁명은 수도권도, 부산·경남(PK)도 아닌 대구와 광주에서 일어나야 한다. 특정 후보의 당락과는 별개의 문제다. 대구에서 문 후보가 30%, 광주에서 박 후보가 20%를 넘겨 득표할 경우 국민이 염원하는 새 정치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이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할 경우 두 곳 시민들은 정치선진화를 말할 자격이 없다. 여전히 편협한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지난 4월 총선 때 대구 수성갑에 출마한 김부겸 민주당 후보와 광주 서을에 출마한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에게 각각 40.42%와 39.70%의 지지를 보내준 두 지역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이번에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