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김주희, 복싱 8대 기구 통합챔피언 첫 등극… “뇌출혈 투병 아빠에 챔프 벨트를 바칩니다”

입력 2012-12-17 01:16

이왕이면 화끈하게 KO로 이기고 싶었다. 어렵게 성사된 경기였기에 욕심이 났다. 거세게 몰아붙이자 상대는 클린치(껴안기)로 공격을 피하기에 바빴다. 보다 못한 심판이 10라운드 1분11초 만에 경기를 중단시켰다. ‘작은 거인’ 김주희(26·거인체육관)의 TKO승이었다. “아빠, 사랑해요.” 김주희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뇌출혈로 쓰러져 수년 동안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아버지를 위해 챔피언 벨트를 바친 것이다.

김주희는 15일 모교인 서울 영등포여고에서 열린 라이트플라이급 8대 기구 통합 타이틀 매치(10라운드)에서 도전자 프로이나파 세커른구릉(22·태국)을 상대로 10라운드 TKO승을 거두고 세계 여자 프로복싱 8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김주희는 이번 승리로 여자국제복싱협회(WIBA), 여자국제복싱연맹(WIBF), 세계복싱연합(GBU), 세계복싱연맹(WBF), 여자국제복싱평의회(WIBC), 국제복싱평의회(UBC), 챔피언오브디그니티협회(CODA) 타이틀에 이어 세계프로복싱연맹(WBPF) 챔피언 벨트를 새로 얻어 8대 기구 통합 챔피언이 됐다. 세계 여자 복싱계에서 한 선수가 같은 체급의 8대 기구 타이틀을 석권한 것은 김주희가 처음이다. 김주희는 이날 승리로 통산 전적 20전18승(8KO)1무1패를 기록했다.

지난 3월 7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오른 김주희는 방어전을 치르지 못하고 훈련만 했다. 경기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김주희는 2004년과 2007년 두 차례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타이틀을 반납해야 했다. 이번에도 피땀 어린 타이틀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타이틀 박탈 직전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체에서 1억5000만원의 타이틀전 비용을 아무 대가 없이 대주겠다고 나타나 시합이 성사됐다.

김주희는 투병 중인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랑하는 아빠, 미국에 있는 언니….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덕분이에요.” 김주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는 IMF 여파로 실직했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그러자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니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졌다.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먹으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김주희. 그는 최근 한 방송사 특강프로그램에서 받은 출연료 1000만원을 저소득층 아이들 공부방에 기부하기도 했다.

김주희는 내년 5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다음 시합을 치를 예정이다. “원정을 가는 것은 처음인데, 챔피언이라고 해서 자만하지 않고 도전자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