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42) 이질적 기억들을 뒤섞는 하이브리드 원심력… 시인 장석원
입력 2012-12-16 17:48
충북 청주시 우암동 395의 10번지는 장석원(43)이 태어나 근 20년을 살았던 고향집이다. 장독대와 공용 수도와 구기자나무가 서 있던 마당 깊은 집이었다. 교사인 아버지는 2남5녀 가운데 막내인 장석원을 한여름 밤에 불러내 등목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 틈에 끼어 성장한 그는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둘째 누나 방에서 팝송을 듣거나 세계 화가들의 화집을 보면서 사춘기를 통과한 그는 한 바가지 찬 물에 소름이 돋던 그 시절의 기억을 뒤로 하고 고려대 국문학과에 합격해 상경한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듯, 7남매를 키워야 했던 부모님은 딱히 막내라고 해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을 들려준 적은 없다. 그는 오히려 누나 방에서 보거나 들었던 모네, 르누아르, 세잔, 피카소의 그림들과 팝송들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으니, 음악을 매개로 한 자의식의 깃발은 이 시절부터 펄럭였던 것이다. 고교 때는 지리를 열렬히 좋아해 지도를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 지도보기는 훗날 포병 관측장교 시절의 주특기로 이어진다.
기억은 1990년 안암문예창작강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복학생 선배들 틈에 낀다. 강사로 초빙된 정현종 신경림 최승자 허수경 등을 째려보던 이 문학청년은 학사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 중에 있던 2002년에 대한매일신문을 통해 등단한다. 한·일월드컵이 열린 해였다. 숨 가쁜 10여년의 세월 안에서 현실사회주의는 붕괴됐고 월드컵의 광기어린 응원가는 귀를 찔러댔다. 어디가 중심이고 어디가 변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시대에 시인의 닻을 올렸으니 그는 우리 시대에 ‘언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늘 품고 다녔다.
우리시대 ‘언어’ 역할에 대한 탐구
혼종의 이미지를 리믹스하는 DJ
“광장은 쪼개지는 곳/ 바람이 그러하듯/ 광장은 중심을 지니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 습도와 명암까지 똑같다// 지루하고 무한한 한 번의 삶이었지만/ 걸인이기도 하고 한 그루 나무이기도 하고/ 첨탑에 걸린 구름이기도 하지만/ 지워진 얼굴로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횡단하는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 밑에서/ 잠을 생각한다, 사랑의 복습을 꿈꾼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무것이기도 했다”(‘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부분)
그 질문은 ‘시가 시대와 현실을 기억할 수 있다면, 기록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의문과 일맥상통한다. 그가 찾아낸 대답은 ‘하이브리드(잡종) 되기’였다. ‘나’의 결단에 따라 능동적으로 먼저 ‘타자들’과 섞이는 것을 그는 소통의 적극적 양상이라고 말한다. 대중문화라는 무궁무진한 텍스트의 바다에서 수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새로운 돌연변이가 헤엄치고 있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세 번째 시집 ‘역진화의 시작’(2012)의 4부엔 ‘DJ Ultra의 리믹스’라는 부제의 시가 여러 편 수록돼 있다. 노래를 중심으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무작위적으로 절취해서 뒤섞은 작품들이다.
“사랑은 깊어져도 실행할 길 없는 이념, 노래는 흘러나왔지만 몸을 적시지 못하고, 빗나간 우리는 돌아가지 못한다네, 사랑이여, 잘도 도는 차돌 맷돌이여, 정의 없는 세상 길 가다 피곤한 몸 쉬었다 가는데, 만나자 이별이지만 이별이 서러워 돌고 도는// 물레방아처럼 몸을 잃고 노래를 잃고 사라진 나의 주인이여”(‘형벌’ 부분)
이 시엔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Lamb Of God’의 노래 ‘Walk With Me In Hell’과 조영남의 노래 ‘물레방아 인생’과 정지용 시 ‘조찬(朝餐)’이 섞여 있다. 그는 대중가요의 가사와 순수시가 만나 저마다의 이질성을 드러낸 채 새로운 감각으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 중이다. 이러한 ‘잡종되기’의 경향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무질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보기에 그건 일상이라는 생활 세계의 무작위적이고 무질서한 측면을 받아들인 특유의 형식인 것이다. 장석원은 단 1㎝라도 다른 시인들과 차별화된 시를 쓰고 싶은 단독자이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