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입력 2012-12-14 18:02

우연한 기회에 ‘인당수 사랑가’란 창작 뮤지컬을 두 번이나 봤다. 이 창작극은 심청전과 춘향전을 혼합해 현대적으로 각색한 데다 우리 가락과 서양 음악을 조화시켰기에 재미있었다. 극 중에서 춘향이는 심봉사의 딸로 개작되고 춘향과 몽룡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비극적 주인공이 된다.

변학도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변학도는 인생의 허망함을 고뇌하다 춘향을 만남으로 삶의 생기를 되찾는 중년의 남성으로서 권력을 미끼로 춘향에게 사랑을 구걸한다. “영원한 건 없어. 변치 않는 건 없어. (몽룡의) 그 사랑은 돌아오지 않아. 사랑의 약속이란 그저 사랑을 할 때의 약속일뿐이야.” 춘향은 오뉴월의 서릿발처럼 차디찬 냉혹함으로 변학도의 구애를 오히려 위협한다. “사또가 원하시는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또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함께 사랑한다는 것

변학도의 행복론은 현실적이다. “평생 그자를 혼자 사랑한다고 그게 널 행복하게 할 것 같으냐.” 변학도의 현실론 앞에서 춘향은 가슴으로 사랑을 토해낸다. “제가 양반 자제 넘본 게 죄라고 하셨죠. 도련님 과거 급제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예, 죄입니다. 예, 다시는 그분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이제야 그 헛된 꿈을 버리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도련님 사랑하는 거, 그건 죄가 아니지요…. 한번 마음 열고 사랑한 사람, 한번 마음 열고 새긴 그 이름, 이 마음을 어떻게 다시 닫아요? 언제 어떻게 닫는지 사또님은 아세요. 저는 그걸 모릅니다.” 결국 ‘죽음처럼 강한 사랑’ 때문에 춘향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뒤이어 이 비보를 들은 몽룡도 춘향을 따라 죽음을 택한다.

‘인당수 사랑가’를 보면서 서양의 고전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린 것은 꼭 나만이 아닐 것이다. 캄캄한 밤 로미오는 담을 넘어가 줄리엣에게 ‘죽음처럼 강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이요.” 누가 안내했는지 줄리엣이 묻자 로미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안내한 건 사랑이요. 그대를 찾으라고 재촉한 것도 사랑이고 지혜를 빌려 준 것도 사랑이요.” 셰익스피어의 극이 늘 그렇듯 이야기는 빠른 호흡으로 전개된다. 줄리엣은 곧 결단한다. “운명을 송두리째 그대 발밑에 던지고 그대를 남편으로 삼아 세상 어디라도 따라가겠어요.” 달빛 아래 방앗간에서 춘향과 몽룡이 비밀스레 혼인을 올렸듯 로미오와 줄리엣도 로렌스 신부 앞에서 비밀결혼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러나 우연한 살인으로 로미오는 추방령에 처해지고 줄리엣의 아버지는 딸이 파리스 백작과 혼인하도록 강권적으로 결정한다. 반면 줄리엣은 자신에게 몰아닥친 ‘죽음처럼 강한 사랑’의 다가올 운명을 예언한다. “신부님께서 맺어주신 이 손이 다른 사람의 손과 다시 엮이고,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느니, 차라리 단검으로 손과 마음을 다 없애버리겠어요.” 며칠 뒤 로미오는 결투 끝에 파리스 백작을 죽이고, 줄리엣 옆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연인의 주검 앞에 망연자실한 줄리엣은 로미오의 품에서 단검을 뽑아 사랑하는 자 위에 쓰러져 죽는다.

아가서 8장 6절(표준새번역)에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인당수 사랑가’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사랑은 죽음을 몰고 올 수도 있으리라.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아 8:6)이다. 사랑으로 인한 비극이 가능한 이유이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이 이런 종류의 비극과 같은 뼈대를 갖고 있는 것이 놀랍다. 사랑의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복음이고(빌 2:6∼8), 이 속에는 사랑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비극의 구조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연인이 ‘함께’ 죽을 때에라야 비극이 완성되듯 복음도 그러하다. 우리의 신앙이 비극과 유사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갈 2:20) “함께 죽었기”(롬 6:6) 때문이다. ‘같이 죽는 것’은 비극적 사랑이 숭고한 근거가 된다.

함께 죽는다는 것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막의 구도자들은 “함께 죽는다”는 것을 ‘눈물’이라고 이해했다. 없애야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자아를 슬퍼하는 눈물이다. 자신을 벗어나 근원에 이르러야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음을 애통해하는 눈물이다. 그러기에 사막의 눈물은 죽기를 원하나 죽을 수 없어 흘리는 죽음의 눈물이다. 압바 아르세니오스는 손노동을 할 때에 눈에서 흐르는 눈물 때문에 일평생 가슴에 천 조각을 달고 살았다. 한 원로는 입김이 있는 곳 어디든지 눈물이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린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죽음처럼 강한 사랑’(아 8:6)으로 자신을 벗어버릴 때에야 나는 그리스도와 영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자와 “함께, 같이 죽는” 비극의 숭고미는 어쩌면 이렇게도 신앙과 예술에서 닮은꼴일까.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