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추남숙] “천사를 품은 어린 배불뚝이들 너희도 꽃이란다”
입력 2012-12-14 18:02
지난 10일 찾은 서울 천연동 구세군 두리홈에는 성탄절 연극 준비가 단연 화제였다. 앳된 외모의 엄마들은 이번 연극에서 누가 어떤 역을 맡았는지 추남숙(52·여) 원장에게 말하며 아기를 안고 까르르 웃었다. 여느 젊은 아가씨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앤디 엄마’ 민영(27·가명)씨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기 예수 역은 석진(가명)이가 하기로 했고요, 임신한 마리아는 미희(가명)가 할 거예요. 영어 대사도 있어요.” 그러자 추 원장이 짐짓 놀라며 답한다. “그래? 우리가 그렇게 수준이 높았었나.” 추 원장의 답변에 주변은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올해는 아이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의미 있는 성탄’을 준비하고 있어요. 밖에선 술집 등에서 친구들과 즐기는 게 성탄의 전부였던 이들이 꽤 되거든요. 이번엔 아기와 함께 예배드리고 선물 교환도 하면서 우리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요. 훗날 이곳을 떠나도 ‘그때 성탄절에 다함께 의미 있게 보냈지’란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어서요.”
추 원장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어린 엄마들은 품속 아기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만요. 이거 배고파서 우는 거예요. 아기 젖 좀 먹일게요.” 포대기에 싸여 꼼지락대는 아이를 능숙한 솜씨로 어르는 이들에겐 방금 전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영락없는 ‘아기엄마’의 모습이었다.
사랑이 네 달란트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추 원장은 25세이던 1985년 대구신학교에 진학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성경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올라와 섬유회사에서 5년간 일했지만 그는 일에 큰 흥미는 느끼지 못했다. 일보다 성경학교에서 배우는 성경공부에 더 관심이 갔다. 84년 대구 경북성경학교에서 공부하던 추 원장은 대구신학교(현 대신대학교)를 알게 됐고 1년 뒤 그 학교에 들어가 그토록 바라던 신학공부를 했다.
목회에 뜻이 없던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당황했다. 모태신앙으로 어린 시절부터 구세군교회에 다녔던 그는 ‘전도사’란 용어도 신학교에서 처음 접했다.
“장로교회에 다니던 동기들은 모두 전도사님인데 구세군교회 다니는 저는 ‘선생’이에요. 그때부터 계속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절 어떻게 쓰실 건가요. 분명 신학교에 보낸 이유가 있을 텐데요.’”
신학교에서 만난 전도사님들은 모두 재능이 많아보였다. 누군가는 노래를 잘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렸다. 공부를 잘하는 이도 많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거나 용모가 빼어난 이들도 있었다. ‘왜 난 저들의 장점 가운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까.’ 내심 속상해하던 추 원장은 기도 중 ‘네 달란트는 사랑’이란 응답을 받았다.
“신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이런 말씀을 주세요. ‘내가 네게 준 것은 사랑이다. 베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네 달란트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생겼어요. 가야 할 방향을 알았으니까요.”
내가 이들과 뭘 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추 원장은 88년 대구 구세군 우정의집 상담센터에서 노숙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의욕이 넘쳤던 당시 28세의 그는 대구역과 동대구역을 누비며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인에게 찾아가 따뜻한 차를 권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아침만 되면 간밤에 과음한 노숙인이 상담센터 창문을 두드리며 그를 찾는 것이었다. 그를 찾는 일부 노숙인의 손엔 피가 묻어 창문엔 매일 핏자국이 남았다.
“나름 노숙인을 품으려고 노력한 건데 이들은 나를 이성으로 보더군요.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제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요구해요. 이때 알았죠. ‘이(노숙인) 사업은 남자들이 해야겠구나. 여자로서 이 일을 하기엔 한계가 있구나.’”
복지단체보다 교회 전도사가 더 맞겠다고 판단한 그는 여러 곳에 청빙지원서를 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추 원장을 찾은 건 다시 복지시설이었다. 90년 그는 부산 구세군 여성복지관으로 가 윤락여성을 대상으로 2년간 생활지도와 상담을 했다.
“복지관에서 여느 때처럼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날따라 설교말씀이 가슴에 더 와 닿았어요. 요한복음 21장 18절인데 ‘젊을 때는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니 늙어서는 다른 이가 네가 원하지 않는 곳에 데려간다’는 내용이었죠. 제 사명이 ‘사랑’인데 그간 너무 형식적으로 사역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시에 ‘이제 구세군에 가야 할 때’임을 직감했어요. 아무래도 교회 전도사가 맞는 거 같아 사관학교 입학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거든요.”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92년 구세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추 원장은 이때부터 계획대로 사는 삶이 아닌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된다. 사관학교 졸업 후 경북 영덕의 시골교회를 2년간 맡은 그는 다시 대구 구세군 우정의집에 돌아왔다. 노숙인의 행패는 여전했지만 추 원장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하며 노숙인, 청소년, 소외계층 여성과 6년간 동고동락했다.
2001년부턴 구세군 대전 여성의집에 원장으로 발령이 나 7년간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돌봤다. 결혼 안 한 42세 원장인 그녀가 남편의 술주정과 폭행에 지친 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한을 풀어주는 것’. 추 원장은 저녁 9시마다 기도회를 열어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해줬다. 명절 때는 이들의 자녀들에게 명절 음식과 세뱃돈을 주며 할머니가 돼 주기도 했다.
시설 운영도 야무지게 했다. 추 원장은 1.5t 탑차를 직접 운전하며 발품을 팔아 푸드뱅크 운영 지원금을 연간 200만원에서 3억원으로 키웠다. 운영비만큼 늘어난 음식은 주변 소외계층에게 도시락으로 돌려줬다. 이 덕분에 그는 2006년 국무총리상과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구세군에서 여성시설 운영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2007년 구세군 두리홈 원장으로 발령 받았다.
“‘미혼모에게도 당신이 필요하다’란 말을 듣고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데 마음이 복잡해집디다. 도대체 그 어린 배불뚝이들과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들과 나이 차이도 많고, 결혼도 안 했는데. 미혼모 시설 입·출소를 반복하며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고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추 원장은 두리홈에서 만난 아이들이 유달리 책임감이 없거나 문란한 성생활을 해온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출을 일삼는 비행청소년뿐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앞둔 신입생이나 20∼30대 회사원도 한순간의 실수로 미혼모가 됐다. 그리고 그 실수로 이들은 ‘미혼모’라는 주홍글씨와 함께 인생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19세에 두리홈에 온 아기 엄마가 있어요. 아기 아빠는 고등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였는데 임신했다는 이유로 아기 엄마만 퇴학당하더군요. 미혼모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결국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취득했고 지금은 취업해 회사 다녀요. 사회에서 미혼모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한 같이 실수해도 여자만 책임을 다 떠맡는 구조는 계속될 겁니다.”
그래서 추 원장은 두리홈에 들어온 모든 미혼모에게 ‘누구나 실수한다’고 위로한다.
“전 모든 아이들에게 ‘미혼모라고 포기 마라, 이건 실수지 실패나 죄가 아니다’라고 해요. 누구나 실수하잖아요. 돈이나 지식으로 실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친구들은 몸으로 했을 뿐이죠. ‘100살 인생에서 20년은 아무것도 아니니 여기서 인생을 유턴하자’는 말도 덧붙여요. 입양을 보내든, 키우든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하니까.”
두리홈에는 현재 산모와 아이가 각각 9명씩, 임신부가 5명 살고 있다. 이곳을 거치는 미혼모는 1년에 100여명 정도. 두리홈이 입양기관이 아닌 보호시설이라 입양을 생각했던 이들도 또래들이 아기를 잘 돌보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양육을 택하는 경우도 꽤 된다. 추 원장은 양육을 선택한 이들을 위해 취업을 위한 기술교육이나 학력 취득을 위한 공부를 하도록 적극 돕는다.
출산 이후에도 양육과 자립을 위한 지원은 계속된다. 추 원장은 경제 사정 때문에 어린아이를 두고 일터에 나서야 하는 미혼모를 위해 2008년 양육모 공동생활가정인 구세군 디딤돌(중간의집)을 세웠고, 2010년엔 베이커리 카페이자 의류 매장인 ‘엔젤스토리’를 열었다. 그 결과 두리홈과 디딤돌을 거친 이들 상당수가 현재 간호조무사, 바리스타, 세무사, 장교가 돼 사회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여기에 들어온 사람 누구나 자립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을 따야 자립할 수 있고, 같은 실수를 다시 안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이곳에 오거나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할 뿐이죠.”
아이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추 원장은 이들이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사회로 돌아가길 원했다. 또 아이가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라 ‘인생 새 출발의 계기’가 돼 살길 바랐다.
“여기는 기초생활수급자가 없어요. 대신 모두 힘들게 벌고 저축해서 자신과 아이의 미래를 준비하죠. 디딤돌에 있는 한 친구가 제게 ‘원장님, 기초수급자 안 되길 잘했다’고 해요. 수급자 자격을 유지하려고 저축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내 힘으로 일해서 돈을 모으는 게 더 보람 있고 가치 있다는 거죠. ‘미혼모란 편견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 대신 직업을 갖고 전문가가 돼 씩씩하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앞으로 더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12월 그는 구세군 두리홈과 디딤돌 미혼모의 수기를 담은 ‘너도 꽃, 이제 피는 거야’란 책을 발간했다. 무조건 이들은 문제아라는 인식을 없애는 한편 잘못된 가정환경이 미혼모를 만들어낸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다.
“제가 볼 때는 부모의 폭력과 무관심으로 이 아이들이 피해자인데, 사람들은 나쁜 짓한 아이들 탓이라 책임을 전가하잖아요. 왜 이 아이들이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리려고 책을 냈어요. 담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내년쯤엔 2권을 낼 계획입니다.”
두리홈 건물에서 사는 추 원장은 함께 사는 이들처럼 미혼이다. 혼자이기에 24년간 고통 받는 여성과 함께할 수 있었고, 사재를 털어 이들의 장학금도 지원할 수 있었다는 그는 결혼보다 당장 미혼모자 양육공간을 위한 공사비 마련이 더 시급하다고 했다.
“나는 이 친구들이 성경에서 나오는 ‘룻’처럼 살았으면 해요. 이방인인 룻이 들판에서 이삭을 주워 가난에서 가족을 구원하듯, 이들이 이곳에서 일과 신앙을 찾아 자신과 아기를 구원했으면 좋겠어요. 원해서 미혼모가 되고, 이곳에 온 건 아니지만 이들이 신앙을 갖고 자신이 귀하게,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을 경험하길 항상 기도합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