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어린아이 수난시대

입력 2012-12-13 18:18


보름 전쯤 경남 창원의 주남저수지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벌써 잊혀지고 있지만 그것은 21세기 문명사회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재앙이었다. 남편과 이혼소송 중인 30대 엄마가 아빠가 보고 싶다고 칭얼대는 세 살배기 아들을 화장실에 데려가 때려죽인 뒤 비정하게 시신을 가방에 넣어 저수지에 수장시킨 것이다.

짐승도 제 새끼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데 사람이 어린 자식을 향해 이렇게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런 참담한 재앙의 사태가 처음은 아니다. 부부 싸움하다가 홧김에 어린 자식을 아파트 창밖으로 던져버렸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고, 보채는 어린애를 심하게 구타해 온몸에 시퍼렇게 멍든 사진을 보고 얼굴을 찡그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자녀는 부모 소유물 아니다

툭하면 터지는 아동 성폭력 사태는 이제 더 이상 가리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치부가 되어버렸다. 특히 친부나 양부가 어린 딸을 성폭행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례가 자주 보도되는 이즈음이다. 가히 어린이 수난시대라 할 만하다. 세상이 타락해도 이렇게 타락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이를 어른의 사적 소유물로 착각하는 한 이런 사건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비록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이지만 어린이도 엄연히 독립된 인격체이다. 부모가 제 몸을 통해 낳은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에 대한 양육의 책임은 소유물의 관리 차원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을 밑절미로 삼아야 한다. 이는 법적인 책임 소재를 떠나 한 인간이 어른이 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생명을 키워 그 생명의 고귀한 참뜻을 구현해 나가는 양육의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 숭고한 의미를 새기지 못한 유치한 어른들이 무고한 어린 생명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멀쩡하게 보이는 우리의 어린 자녀들은 무책임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경쟁의 사육장에 던져진 채 자주 시달린다. 방과 후에도 제대로 뛰어놀지 못하고 피로한 학원공부와 도피성 컴퓨터 게임을 오가면서 그들은 소모적 일상 가운데 파김치가 되어 간다. 참 딱한 현실이고 불쌍한 생명의 도가니 아닌가.

구약성서 에스겔이 보여주는 가장 끔찍한 역사적 현실은 전쟁의 와중에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이 아버지를 잡아먹는 비극이었다. 인권의식이 박약하고 체제의 기틀이 안정되지 못한 고대사회에서 어린이들은 늘 하찮은 잉여생명처럼 취급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어른들이 귀찮아하는 어린이들을 귀하게 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들을 환영했다. 나아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과 함께 어른들에게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한 신뢰의 마음가짐을 배우도록 권고했다.

그런데 오늘날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만이 철칙인 양 자식들을 압박하고 때로 제 감정에 휘둘려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성서는 자녀에게 부모를 순종하라는 계명을 주었듯이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고했건만 그 교훈을 저 편리한 대로 반쪽만 챙긴 결과이다.

어린 생명 사랑으로 키워야

이 세상에 창조주의 은총을 입어 태어난 생명은 큰 생명, 작은 생명의 차별이 없다. 덩치만 크다고 저절로 큰 생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린 생명이 사랑을 먹고 자라 건강한 어른 생명이 되는 이치에 눈떠야 한다. 그 이치를 푸짐하게 살리지 못해도 울부짖는 어린 생명을 학대하며 때려죽이는 범죄는 이제 그쳐야 할 때다. 어린이가 부모의 화풀이용으로 두들겨 맞고 어른에게 모질게 수난 당하려고 희생양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을 마냥 천진하게 뛰어놀게 하라. 그들에게 행복하게 숨 쉴 권리를 돌려주라.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