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도깨비 국
입력 2012-12-13 18:41
술은 문자 이전부터 존재했다. 과즙의 자연발효에서 원시시대의 과실주로 이어지다가 농경시대에 곡주가 개발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염소가 먹고 흥분한 열매에서 커피를 발견했듯 술의 발견에도 동물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호칭도 다양하다. 忘憂物(망우물), 美祿(미록), 福水(복수), 竹葉(죽엽), 紅友(홍우), 歡伯(환백) 등의 어휘를 들어보셨는지. ‘福(복)’의 글자도 왼쪽 제사상과 오른쪽 술병이 결합된 모양새다.
이 진기한 음료를 놓고 말도 많았다. “문화의 과즙이요, 낭만의 샘물”이라는 식의 찬사는 식상하다. “술 석 잔에 대도와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 된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는 뻥도 있고, “술을 흡족히 마시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但恨存世時 飮酒不得足)”는 만가(輓歌)도 있다. 시인 키이츠는 “환락의 맛, 시의 샘물”이라는 송가를 남겼다.
이태백은 대작시(對酌詩)까지 지었다. “둘이서 마시니 산에는 꽃이 피고, 한잔 한잔 또 한잔(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한글학자 권덕규 선생은 집을 팔아 몽땅 술을 사 마시고는 마당에 서서 호통을 쳤다고 한다. “네 이놈 집아, 지금까지는 내가 네 안에 살았다만 이제는 네가 내 안에 사는구나!”
술에 대한 지탄은 훨씬 신랄하다. 소크라테스가 하도 술을 마셔대자 부인 크산티페가 소리쳤다. “이놈의 도깨비 국!” 셰익스피어는 “술에 적당한 이름이 없다면 서슴없이 ‘악마’라고 부르겠다”고 단언했고 카뮈는 “인간의 불을 끄고, 동물의 불을 켠다”고 했다. 에디슨은 과학자답게 “사람 머리에 술을 넣는 것은 기계에 모래를 넣는 것과 같다”고 힐난했다.
음주 단계를 동물에 비유한 글도 있다.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땐 양처럼 온순하고, 조금 마시면 사자처럼 강폭해지고, 좀 더 마시면 돼지처럼 더러워진다.” ‘명정(酩酊) 40년’을 남긴 변영로도 취중실수가 많았던 것 같다. “내 지난날 술에 취해 설중생리(雪中生理) 몇 번이고, 오투타가(誤投他家) 몇 번이며, 취와노상(醉臥路上) 그 얼마던가.”
술의 해악은 엄청나다. 간과 위장이 상하는 것은 물론 피부가 거칠어지고, 심장근육이 딱딱해 지며, 뇌세포가 무수히 파괴된다. 최근에 20대가 폭탄주를 가장 즐긴다는 조사가 나왔다. 성인 30%가 1주일에 한번 이상 폭음(남자 소주 7잔, 여자 5잔)해 세계평균(11.5%)의 3배에 달했다. 도깨비 국이 넘치는 연말, 돼지가 되지 않으려면 절주의 지혜를 찾아야겠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