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산재와 엄벌주의
입력 2012-12-12 22:31
지난 가을 한동안 지면을 장식했던 구미 불산누출 사고도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이런 대형 사고 후에는 부실한 예방체계와 방재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개선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환경부, 고용노동부, 지식경제부 간의 책임공방은 펼쳐졌지만 사고 예방 대책이나 위기관리 대응체계 개선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환경부의 한 고위 관리가 대기발령을 받았고, 총리실의 책임소재 조사에 이어 모 지방청장으로 전보됐다. 주민 피해에 대해 환경부가 주무부처로 책임을 떠안은 셈이다. 사고 발생 다음날인 9월 28일 환경부가 위기경보를 ‘심각’ 단계에서 서둘러 해제해 2차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매뉴얼에 따라 위기경보를 발령하거나 해제할 때는 자체 위기평가회의를 열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위기대응 체계의 가장 큰 문제는 유해 화학물질 관리를 총괄하는 부서가 없다는 점이다. 취급·운반·보관 등은 환경부 소관이나 대부분 업무가 지방자치단체에 맡겨져 있다. 누출 사고의 관할은 사고 지점과 경우에 따라 산업공단과 지경부, 소방방재청, 환경부 등으로 나뉘어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사고 현장에서 5명의 근로자가 사망했지만 정부 대응과 언론 보도는 인근 주민 피해에 집중됐다. 환경부도 물론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불산 누출 사고는 본질적으로 산업재해로 봐야 한다. 사고 지점이 사업장 바로 옆이라고 해서 고용노동부는 책임을 벗어났지만 성격상 작업 중 안전사고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수수방관했다.
사고 원인 조사 결과 영세 하청업체 근로자들이 불산 원료를 공장 탱크로 옮기는 작업을 하던 중 한 작업자가 연료 밸브를 발로 밟아 8~10t의 불산가스가 누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작업자들은 작업 순서 매뉴얼 등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뿐더러 안전보호 장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유해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주는 유해물질 정보를 노동자에게 제공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즉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물질이나 작업장에 부착하게 돼 있고, 이를 해당 근로자에게 교육해야 한다.
책임공방이 펼쳐졌지만 논의는 사후대응 부실에 집중됐다. 그러다 보니 불산의 장기적 증상이 과장된 채 알려지고 ‘불산괴담’이 나도는 등 당국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휘발성이 강한 불산의 특성을 감안할 때 잔류오염 위험도 언론에 의해 증폭된 측면이 있다. 결국 사고 지역의 농작물뿐 아니라 4000마리에 이르는 가축도 다 ‘폐기’하기로 하는 등 정부의 과잉 대응을 낳고 말았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위험에 대한 소통)의 실패다.
주요 대선 후보들도 이런 ‘제도화된 위험’에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장외(場外) 영향평가제’와 환경오염피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산업재해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없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환경피해책임법과 함께 화학물질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통합관리 시스템과 위기대응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또한 중대 산업재해와 산재 다발 사업장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강화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과 실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노동자가 매일 6명씩 산재로 숨져간다. 최근에는 산재 사망자의 85%가 하청업체나 중소기업 노동자다. 산재 유형도 원시적인 추락사고가 태반이다. 안전장치만 갖추면 예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최근에는 하청기업의 사망 사고에 대해 원청기업에도 책임을 물리고 있다. 그러나 처벌은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그친다. 기업들이 산재 예방에 투자하길 꺼리는 것은 처벌을 받는 게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보다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나 의무적 금고형 같은 엄벌주의는 같은 일을 하는 근로자에 대한 차별행위가 아니라 중대 산업재해를 일으키는 기업주부터 적용돼야 한다. 360명에 불과한 산업안전감독관이 전국 산업 현장의 법규 위반을 일일이 단속한다는 것은 허구다. 산재 분야에서는 철저하게 사업주에 대한 결과책임주의를 채택해야 한다.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