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류병운] 급발진 방지장치 개발 서둘러야
입력 2012-12-12 19:41
얼마 전 한 지상파의 자동차 급발진 관련 시사 프로그램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급발진 의심 차량에서 추출한 전자제어장치(ECU)를 멀쩡한 동종의 차량에 옮겨 장착한 후 시동을 걸자 급발진 현상이 재현되었다. 브레이크 대신 가속페달을 밟은 경우와 더불어 현재 급발진의 원인으로 추측되어 왔던 ECU 결함에 의한 스로틀(연료의 공급 조절)밸브의 오작동이 규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렇게 쉽게 재현할 수 있는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문제를 왜 미국같이 자동차 문화가 앞선 나라에서 수년간의 교통안전청(NHTSA)과 항공우주국(NASA)의 합동조사와 실험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을 재현하거나 원인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단 말인가?
앞서 거론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한마디로 재현이 아닌 조작의 냄새가 짙은 실험이었다. 재현할 때 급발진 의심 차량의 ECU를 같은 모델인 차량의 전체 ECU와 교환하지 않고 일부에 불과한 칩 하나만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칩 하나만을 교체하기 위해서 납땜을 다시 했을 수도 있다. 증거법의 관련성(relevancy) 원칙, 즉 어떤 사고의 사실에 대한 증명은 그 사고차량으로 해야 한다는 상식이 무시되었다.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급발진 의심 사고의 대부분은 운전자의 형사사건을 수반하기 때문에 증거의 보전이 중요한데, 그러한 차량의 ECU에서 칩을 떼어 냈다면 형법상의 증거인멸죄에 해당할 것이다.
국내 급발진 주장 사고들에 대하여 최근까지 정부나 합동조사반은 단 한 번도 그러한 사고가 차량 결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1년 전 서해대교에서 급발진 사고를 일으킨 고급 외제차량은 바퀴잠김방지장치(ABS)가 작동하고 제동등도 점등된 것으로 나타났으나 차량 결함은 발견되지 않아 ABS의 작동이 물리적 관성에 의한 것인지 운전자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하여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사실 운전자의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주장과 그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어려운 현재 상황은 형사사법체계까지 흔들고 있다. 사망 교통사고의 가해자인 운전자가 급발진을 주장한 사건에서 법원이 거듭해서 무죄판결을 내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변호사가 사고 운전자에게 일단 급발진 주장부터 해보라고 조언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국민의 우려와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상황에서 현재의 급발진 문제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필요하다면 급발진 조사 및 연구 능력의 강화를 위한 시설과 인적 자원도 보강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제작사의 노력이 필요하다. 급발진 사고 신고가 들어오면 가급적 신속하게 사고기록장치(EDR)를 공개하여 당사자의 의혹을 해소해 주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페달을 잘못 밟는 경우를 포함 급발진 사고 방지 장치를 서둘러 개발해야 한다.
지난달 22일 국회에서 미국과 유사하게 제작사가 차량에 EDR을 장착하는 경우 필수 사항이 기록되도록 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고지하도록 하며, 사고 발생 시 제작사는 원하는 소비자에게 EDR에 기록된 정보를 의무적으로 제공토록 하는 내용의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이 통과한 것은 급발진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진전이다. 급발진 문제가 세계 도처 다양한 차종에서 주장되고 있는 만큼 모두가 차분하고 성숙된 모습으로 대응해야 한다.
류병운(홍익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