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에너지 자립’ 눈앞… 세계경제·외교 판 바꾸나

입력 2012-12-11 18:09


1973년 11월7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프로젝트 인디펜던스(Project Inpendence)’로 명명된 에너지 자립 계획을 선언했다. 1980년까지 원유 등 에너지 수입을 제로로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등 서방의 이스라엘 지원에 불만을 품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수출 중단으로 국제원유가가 4배까지 치솟아 세계 경제가 큰 충격에 빠진 와중이었다. 닉슨 이후 일곱 명의 대통령이 거쳐 가는 동안 이 계획만큼 실패한 국정어젠다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여덟 번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집권 2기를 눈앞에 둔 지금 미국이 곧 에너지 순수출국이 될 것이라는 진단이 잇따르고 있다. 이 경우 쇠퇴기에 들어섰다는 미국 경제가 부흥할 것이고, 세계 경제 판도와 지정학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셰일가스·기술혁명이 원동력=미국 발 에너지 혁명에 대한 진단 중 결정판은 지난달 12일 발표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연례 ‘세계에너지전망(World Energy Outlook)’보고서였다. IEA는 “미국의 석유 생산 증가세로 볼 때 2017년 하루 1110만 배럴 생산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1060만 배럴을 넘어설 것”이라고 했다. 5년 뒤에 미국이 사우디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1위 원유 생산국이 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2030년이면 미국이 에너지를 완전 자급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저명한 에너지 전문가인 컨설팅기업 PK블리저의 필립 블리저 회장은 더욱 낙관적이다. 국제경제정책 전문 계간지 ‘인터내셔널 이코노미’ 2012년 봄호에서 그는 닉슨의 에너지 자립 선언 50주년이 되는 2023년 미국이 에너지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에너지 순수출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급변의 중심에는 셰일가스(shale gas)로 대표되는 ‘비전통 화석 에너지’의 부상이 있다. 셰일가스는 진흙으로 이뤄진 퇴적암층(셰일층)에서 뽑아낸 천연가스를 말한다. 일반적 의미의 천연가스보다 훨씬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암석의 미세한 틈새에 넓게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기존의 천연가스와 같은 수직시추는 불가능하지만 수평시추(매장층에 수직으로 구멍을 뚫은 뒤 수평으로 접근)를 통해 채취할 수 있다.

경제적, 기술적 제약으로 채취가 어려웠던 셰일가스는 2000년대 들어 물과 모래, 화학약품을 섞은 혼합액을 고압으로 분사하는 수압파쇄법과 수평시추 등이 상용화되면서 신에너지원으로 급부상했다. 2010년 북미 지역의 셰일가스 생산량은 2000년에 비해 15.3배나 확대되었으며, 미국은 2009년 이후 러시아를 제치고 천연가스 1위 생산국에 올라섰다.

천연가스 채굴에 도입된 신기술은 원유 생산에도 적용돼 이른바 ‘타이트 오일(tight oil)’붐을 이끌어 냈다. 암석층에 끼여 있어 생산이 불가능하거나 경제성이 없어 채굴을 포기했던 원유 생산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내 원유 생산량은 25%나 급증했다.

이러한 미국의 에너지 혁명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블리저 회장은 “미국이 에너지를 자급하고 세계 화석에너지 생산이 증가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없었다”면서 “에너지 벤처기업을 지원할 수 있었던 금융시스템, 차연료 가격의 고공행진, 셰일가스 채굴의 채산성을 높여준 미국 지질구조 등 우연이 겹쳤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와 지정학에도 혁명적 변화?=미국의 에너지 혁명은 미국 경제와 정치는 물론 국제정세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컨설팅회사 IHS글로벌은 최근 발간한 ‘미국의 새 에너지 미래’보고서에서 에너지 자급으로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 정부재정 수입 증가 등이 촉발될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는 비전통적 가스와 원유 생산 증가로 이미 170만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으며 2020년에는 300만 개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주와 연방정부의 재정 수입은 1100억 달러가 늘어난다.

미국 경제 전반의 경쟁력 향상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됐다. 미국의 천연가스 가격은 유럽의 3분의 1, 일본이나 한국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에너지 사용이 많은 미국 제조업은 낮은 생산비에 힘입어 엄청난 가격 경쟁력을 누릴 것이 분명해졌다. 보고서는 이러한 값싼 에너지에 힘입어 미국 경제의 새 황금기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 세계 지정학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영국의 가디언은 베를린 장벽 붕괴, 중국의 부상에 이어 미국의 에너지 자급이 최대의 지정학적 변동을 촉발할 것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에너지 자급으로 미국의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낮아짐에 따라 미국 외교정책 우선순위에서 중동이 밀릴 가능성이 있다. IEA의 리처드 존스 사무차장은 “앞으로 중동산 석유의 90%는 중국·인도 등 아시아 국가로 쏠릴 것”이라며 “중국이 차지할 원유를 보호하기 위해 미 해군 5함대가 페르시아 만에 계속 주둔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적 에너지 전문가인 다니엘 예르긴 박사는 “지금도 미국에서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12%에 불과하다”며 “세계 경제 전체의 안정적 원유 접근과 공급선 확보를 주시하는 미국이 중동으로부터 손을 떼는 것은 당분간 상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산유국이라는 강점만으로 국제정치 구도에서 대접받아온 일부 중동의 왕정국가들은 미국의 관심이 줄어듦에 따라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중동 산유국보다도 더 큰 패자는 러시아가 될 공산이 높다.

영국의 외교분야 싱크탱크인 국제전략연구소(IISS)의 니콜라스 레드먼 선임연구원은 “높은 가격의 천연가스에 목매고 있는 러시아는 저가의 미국산 셰일가스 등장으로 이미 충격을 받고 있다”며 “유럽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줄여갈 경우 다른 경제 성장 대안이 없는 러시아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봉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