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통일은 생각보다 갑자기 왔다… 한국, 그 이후까지 준비하라
입력 2012-12-10 21:36
한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
그는 ‘통일 독일 총리’라는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통일 위업을 달성한 첫 독일 총리 자리는 상대편이었던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역사는 그를 통일 과정의 조연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한스 모드로프(83)는 동·서독을 가로 막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나흘 뒤인 1989년 11월 13일, 난파선과 같았던 동독의 총리가 됐다.
동독을 지배했던 공산주의 세력인 사회주의통일당(SED)이 지명한 마지막 총리다. SED는 동독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개혁주의자이자 당내 비판세력이던 그를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총선을 실시한 뒤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5개월의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SED의 오랜 독재를 끝내고 동독에 민주주의를 도입한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를 지난달 30일 베를린에 위치한 독일 좌파당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통일은 반드시 이뤄야 하지만 어떤 결과를 낳는 통일인지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면서 “통일에는 밝은 면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그 어두운 부분을 최소화하는 게 독일과 한국의 공통된 과제”라고 강조했다.
통일은 갑자기…준비가 필요하다
그의 얘기는 동독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촉발됐던 1989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7만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11월 4일 동베를린 시위에는 100만명으로 불어났다.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던 에리히 호네커 총리는 10월 18일 실각됐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10월부터 확산된 대규모 시위에서 동독 주민들은 ‘우리는 국민이다. 권력은 SED의 것이 아니다’고 외쳤다. 동구권을 휩쓸었던 전형적인 민주화 시위였다. 그런데 새해(1990년)부터 구호가 달라졌다. 동독 주민들은 ‘우리는 한 국민이다’라며 통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동독 시위는 민주화에서 통일 요구로 큰 물줄기를 갈아탔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통일은 예상보다 갑자기 왔다”고 토로했다. 동독에서 통일 외침이 울려 퍼진 지 불과 9개월 뒤인 90년 10월 3일 역사적인 독일 통일이 이뤄졌다.
그는 “서로 다른 체제에서 오랜 기간 갈라져 살다보니 일부 발생하는 혼란은 불가피하다”면서 “한국도 갑작스러운 통일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토지 문제를 예로 들었다. “동독 땅은 국가 소유였다. 1990년 3월부터 동독 주민들이 토지를 싼 가격에 살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런데 통일 이후 서독 사람들은 물론 폴란드 등에 이주해 살았던 독일 사람들도 동독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한 토지에 여러 소유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경제는 분명히 발전했다. 그러나 소득 불균형과 임금 차별, 동독 지역의 노령화 현상 등의 문제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통일 한국도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큰 만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과 북이 통일 과정 주도해야
89년 12월 19일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가 동독을 공식 방문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콜 총리와 ‘그동안 동·서독이 아무런 계약이 없었는데, 통일을 앞두고 우리 사이에 어떤 계약을 맺어보자’는 데 합의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회담을 비롯해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졌다.
통일이 가시화되자 주변 강대국들의 외교전이 불을 뿜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1989년 12월 동독을 방문해 ‘독일 통일은 동독과 서독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모든 유럽 국가가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존 메이저 영국 총리도 동독에 와서 ‘통일 독일은 영국 법과 제도를 많이 따랐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떠올렸다.
미국은 통일 독일 군대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잔류를 강하게 희망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독일군을 방어만 하는 중립군으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세는 이미 나토 잔류로 기울었다.
콜 총리에 대한 모드로프의 평가는 인색하다. 그는 “나토 잔류는 미국의 아이디어였지만 콜은 자신이 만든 것처럼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는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고 온 뒤 ‘모스크바에서 통일의 열쇠를 찾았다’고 선언했다. 나토 잔류라는 열쇠는 존 베이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만들었고, 콜은 그 열쇠를 운반만 했다”고 전했다.
독일 통일은 동·서독이 먼저 합의하고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추인하는 ‘2+4회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한국에서 통일 논의가 본격화되면 특히 북한을 많이 도와준 중국과 러시아의 입김이 거셀 수 있다. 통일 과정에서 독일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의견에 많이 휘둘렸다. 한국은 통일을 추진할 때 미국·중국·일본·러시아에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전달하라. 그리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통일의 주체가 전 국민이 되면 주변국도 무리한 주장을 펼치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베를린=글 하윤해 기자, 사진 이동희 기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