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朴·文, 경제민주화·복지정책 獨 벤치마킹
입력 2012-12-10 19:00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제1 공약은 ‘공정성을 높이는 경제민주화’다. 출마선언 당시보다 의지가 약해졌다는 논란이 있지만 박 후보는 여전히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이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한다. 박 후보 경제 멘토로 불리는 새누리당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헌법 119조 2항에 ‘경제민주화’ 개념 반영을 주도한 인물이다.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김 위원장은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위원장은 박 후보를 만날 때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기민당이지만 사민당의 정치적 자산을 흡수했다. 복지제도를 처음 시작한 것도 보수주의 정치인 비스마르크였다”며 독일 벤치마킹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지난 2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사퇴한 진보정의당 심상정 전 후보와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후퇴하지 않는 경제민주화, 사람이 먼저인 복지국가 등이 선언문에 포함돼 있다. 정치개혁과 관련, 문 후보는 이미 약속했던 ‘대선 결선투표제’ 외에도 “정당에 대한 지지가 의석수에 비례해 반영되는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하겠다”며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검토 의사를 밝혔다. 문 후보는 앞서 의료비 환자 본인부담 연 100만원 상한제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본인 부담액을 연간 총소득의 2%(장기 만성질환은 1%)로 제한하는 독일 의료정책과 유사하다. 또 벤처·중소기업 활성화를 위한 모태펀드 출자 재원 확대 약속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세제 혜택을 통한 ‘미니잡’(1인기업) 육성책을 떠오르게 한다.
대선 경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집권을 누가 하든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내용 차이는 있지만 유력 후보들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주요 공약으로 내건 것도 이 때문이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저성장 시대로 접어든 이상 과거 성장 위주의 정책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 모두 동의한 것이다. 대선 후보들과 전문가들이 대안으로 독일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법, 의료법, 보험제도, 노사관계 등의 근간이 이미 19세기 말 정립된 후 시대 흐름에 맞게 이를 수정·보완해 오고 있는 독일의 저력이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도 돋보이고 있어서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 곳곳에서는 독일이 보인다. 총수일가 사익편취 행위에 대해 엄격처벌 등 공정성을 강조하는 새누리당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기업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되 국가는 공정한 심판자 역할을 하는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 시스템과 흡사하다. 독일은 독과점방지법, 환경법, 노동법, 안전위생관련법 등을 통해 경쟁을 저해하고 사회에 피해를 끼치는 업체는 단호히 처벌하고 있다. 박 후보와 민주당 문 후보가 함께 내건 골목상권 보호 공약 역시 대형마트가 입점하려면 까다로운 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쳐야 하는 독일 정책과 유사하다.
하지만 두 후보 모두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의 핵심으로 꼽히는 노사공동경영제(Mitbestimmung)에 관한 언급은 없다. 경영자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한 영미식 자본주의에 익숙해진 터라 급격한 변화에 대한 부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투자,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경영 결정이 이들 이사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걸러질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노사관계 전문 컨설팅 ‘워크인연구소’ 이문호 소장은 10일 “노사공동경영결정권의 제도화로 오너 체제가 악용될 수 있는 여지가 적다”며 “노사가 공동 책임을 지기 때문에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복지와 관련, 박 후보나 문 후보 모두 반값 등록금, 무상보육 등을 ‘진정성 있는 정책’이라고 내세운다. 선택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는 논란이 남아 있지만 차기 정권이 복지예산을 확대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독일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예산 비율이 북구 유럽 국가 못지않게 높다. 특히 1834년 비스마르크가 도입해 지금까지 발전시켜 온 의료보험 제도는 벤치마킹 대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중소기업을 키워내는 독일의 산업 기반뿐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정책도 후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다. 박 후보는 산업용 전기요금을 현실화해 그 금액으로 중소기업에 지원하고 남은 금액으로 재생에너지에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문 후보는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을 폐기하고 현재 2% 수준인 재생에너지 점유율을 2020년까지 20%까지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밖에 연방정부 아래 독자적인 자치입법·사법·행정권을 가진 지방정부로 구성된 독일식 시스템에 대해서도 후보들은 공약 반영을 검토하고 있다. 이처럼 차기 정부의 롤 모델은 독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분단을 극복하고 유럽의 재정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독일이 우리에겐 이상적인 전범(典範)이기 때문이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