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눈 오는 날의 정취
입력 2012-12-10 18:46
一夜寒威特地多간밤 내내 추위가 유난하더니
晩來風力拳漁蓑저녁 찬 바람 어부의 도롱이 젖힌다.
强將雪水添茶鼎눈을 녹인 물로 차를 달이노라니
奈此千山暮景何천산의 저녁 눈경치를 어이할거나
권필(1569∼1612) ‘석주집(石洲集)’ 제7권 눈 온 뒤의 만흥
겨울로 들어서자마자 연일 큰눈이다. 겨울 초입에 내리는 세 번의 눈은 납전삼백(臘前三白)이라고 하여 상서로움의 상징이다. 세상의 모든 길이 묻히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깊은 흉터도 덮인다. 길이 묻히기에 사람은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흉터가 덮이기에 마음은 한결 너그러워진다. 하얀 풍경 속에 바람은 알싸하고 마음은 따뜻하다.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미리 보내온 선물처럼 반가운 눈이다.
눈이 오면 아이건 어른이건 마음이 들뜨기 때문에 눈이 오는 날은 고사도 적지 않다. 진(晉)나라의 명필 왕휘지(王徽之)는 산음에서 큰눈이 내리던 날 한밤중에 잠이 깨었다. 잠시 뒤 눈이 멎고 달이 나오자 사방이 온통 백색 세상이 되었다. 그 아름다운 경치에 문득 흥이 난 왕휘지는 홀로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었다. 또 성당(盛唐)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눈이 하염없이 오는 날 나귀를 타고 패교(覇橋)를 지나가며 시를 지었다. 이 때문에 ‘시흥은 바람 불고 눈 오는 날 나귀를 타고 패교를 지날 때에 일어난다(詩思在覇橋風雪中驢子上)’는 말이 생겼다.
우리나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눈경치를 즐기러 밤새 산길을 거니느라 ‘미친 듯 거니느라 잠을 잊었다(狂走或忘眠)’고 하였다. 또 그 옛날에도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교통사고가 종종 일어났는지 어느 시인은 ‘채찍 휘둘러 말 빨리 몰지 말라. 둑길의 앞 수레가 미끄러져 비틀거린다(且莫揚鞭驅馬疾 長堤前有間關車)’라고 읊기도 하였다.
그러나 눈 오는 날의 정취로 차를 달여 마시는 재미만한 것도 없을 듯하다. 눈은 하염없이 내려 세상은 원근이 지워졌다. 이런 날 따뜻한 방에 앉아 좋은 향을 하나 피운다.
이규필(성균관대 대동문화硏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