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정태] 피로 증폭시키는 대선 후보들

입력 2012-12-10 19:14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성과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가 현대사회의 성과주의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한 ‘피로사회’의 핵심 내용이다. 2010년 독일에서 출간돼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으로 지난 3월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이후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당선자께 추천한 ‘피로 사회’

이 책이 제18대 대선를 앞두고 다시 주목받고 있다. 출판인들이 당선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1위로 꼽았기 때문이다. 최근 월간 출판잡지 ‘라이브러리&리브로’가 100개 출판사 출판인 1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이 책을 추천한 이유로는 ‘국정 운영에 지혜를 주고 싶어서’(60.5%)가 가장 많았다.

‘피로사회’는 128쪽의 다소 얇은 분량이지만 저자의 철학적 함의와 사유가 담겨 있어 일반 독자들이 해독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은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과거 자본주의가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 ‘해야 한다’고 강제하면서 타인을 착취했다면, 현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생산의 최대화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자기 자신을 망가질 때까지 착취하도록 한다. 즉 긍정의 과잉 시대가 정신 질환과 사회적 병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색적인 삶 등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치료법으로 내놓는다.

물론 국내 학자 중에는 저자의 진단과 해결책을 일부 수긍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도 서문에서 밝혔지만 독일과 한국 사회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 차원만의 치유책도 공감하기 어렵다. 시장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 경쟁지상주의 등에 따른 극심한 피로는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진단하고 치료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피로사회’는 한국 사회의 현실 진단에 상당히 유용한 저서임에는 틀림없다.

대한민국은 치유가 필요하다

그만큼 성공과 성과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피로도가 높다는 점에서다. 계층 양극화를 초래한 경제 분야는 물론 공교육이 붕괴된 교육 분야가 특히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무한경쟁에 짓눌리고 사교육으로 내몰리며 입시 지옥을 거친다. 학벌사회의 폐단이다. ‘피로사회’의 역자(譯者)는 후기에서 교육 논쟁에 대해 한마디 거든다.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수많은 피로를 생산하는 대한민국 사회를 제대로 진단하고 근본 해법을 모색해달라는 염원에서 출판인들이 차기 대통령에게 이 책을 추천했을 것이다. 그에 화답하려면 대선 후보들이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미래의 비전은 보여주지 않고 과거 정권의 과(過)를 따지며 무차별 비방과 흠집 내기에 집중하고 있다.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청사진을 제시하고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게 마땅함에도 구태의연한 네거티브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대선 후보들이 피로를 해소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국민 피로도를 증폭시키고 있다. 이념 대립에 매몰된 선거판은 언제쯤 바뀔 것인지….

박정태 문화생활부장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