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예고됐던 검찰의 위기
입력 2012-12-09 18:12
현재 검찰이 겪는 위기는 돌발적인 악재로 인한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검찰 스스로 예고했던 위기다. 구조적인 문제들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지난해 7월 퇴임했다. 그는 퇴임사에서 “화려하고 의기양양하게 비뚤어진 길을 가기보다는 질퍽거리더라도 쩔뚝거리면서도 바른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김광준 부장검사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질퍽거리는 바른길 대신 화려한 비리의 길을 걸었다.
임채진 총장은 2009년 6월 “지금보다 더 절제되고 더 세련된 모습으로 검찰권을 행사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강하고 교만하다는 국민적 지탄과 비판 때문에 검찰이 설 땅을 잃어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상명 총장은 2007년 퇴임사에서 “검찰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화려한 깃을 자랑하는 공작새도 자신의 발밑을 돌아볼 때는 깃털을 접는다”고 겸손한 자세를 주문했다. 김준규 임채진 정상명 총장은 각기 다른 이유와 상황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3명 모두 검찰의 겸손과 절제를 주문했던 것은 그만큼 문제가 구조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제 총장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상대 총장은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최측근인 중수부장과 공개적으로 다퉜고, 후배 검사들의 압박에 밀려 퇴진했다. 한 총장은 지난 3일 “저에게 가장 어려운 싸움은 내부의 적과의 전쟁, 우리의 오만과의 전쟁이었다. 결국 저는 이 전쟁에서 졌다”고 했다. 한 총장의 ‘패전 선언’은 상징적이다. 검찰이 자체적으로 개혁할 동력을 상실했다는 선언인 셈이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패전의 수모를 감당해야 한다. 패전의 수모는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외부에서 불어오는 개혁 바람은 상당히 거셀 듯하다. 중요한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검찰의 태도다. 한 총장 퇴진 이후 검찰 안팎에서는 몇몇 음모론과 후일담이 나돌았다. 한 총장의 검찰개혁 시나리오도 그중 하나였다. 한 총장이 중수부 폐지 등을 담은 선제적인 검찰개혁안을 발표하고,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곧바로 검찰이 대대적인 사정작업을 벌이고, 검찰은 사정작업의 힘으로 신정권과 검찰개혁 방안을 타협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시나리오에는 대검 중수부장 캐비닛에 보관돼 있다는 ‘비리 리스트’도 등장한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검 중수부장 캐비닛에는 우리나라 권력자와 재벌들의 범죄 비리 첩보 100여건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비리 리스트는 검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사정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다.
시나리오는 그럴 듯한데, 심각한 허점이 있다. 국민의 싸늘한 시선이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중수부를 폐지하거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검찰이 사정의 칼바람을 일으키더라도 국민들은 박수 대신 검찰의 의도와 순수성을 의심할 가능성마저 커졌다.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많이 까먹은 탓이다.
구체적인 개혁안이 무엇이든 대체적인 방향은 검찰이 그동안 지녔던 것들을 내려놓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한 검찰 간부는 “이제 검찰이 권한을 내놓을 때가 온 것 같다. 나는 그동안 많이 누렸지만 후배들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또한 누리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이유도 없다. 검찰의 권력은 원래부터 국민들 것이었다.
남도영 사회부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