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소나무의 꼿꼿한 기상 오롯이… 한국화가 문봉선 ‘독야청청-천세를 보다’展
입력 2012-12-09 17:33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 뒤편에는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석파정(石坡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다. 그 옆에 600년 묵은 노송(老松)이 장엄한 자태를 뽐낸다. 올해 이 노송에는 유난히 솔방울이 많이 열렸다고 한다. 미술관이 건립되고 관람객들이 몰려들면서 위기감을 느낀 소나무가 후예를 준비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전통 수묵 필법으로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온 한국화가 문봉선(51)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가 석파정 노송을 그림으로 옮겼다. 작품 제목은 ‘천세송(千歲松)’. 수백 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화면 가득 채웠다. 하얀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검은 소나무에서는 솔향기가 솔솔 나는 것 같다.
석파정 노송을 비롯해 소나무 그림 20여점을 모은 작가의 ‘독야청청(獨也靑靑)-천세(千歲)를 보다’ 전이 서울미술관 본관 전시실에서 12일부터 내년 2월 17일까지 열린다. 작가는 홍익대 동양화과에 다니던 대학생 시절부터 30년 넘게 기회가 될 때마다 소나무 숲을 찾아다니며 관찰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소나무를 그린 작품들만 모아 전시회를 열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전시를 여는 게 쉽지는 않았다. 계속 미루다 이번에 큰마음 먹고 소나무 그림을 선보인다. 그는 “저만의 화법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그리면 다른 대가들의 소나무 그림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누가 봐도 ‘저건 문봉선 소나무’라고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며 30년간 망설였다”고 설명했다.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소나무를 그리기 시작한 작가는 태백산맥을 따라 경북 울진의 금강송, 경남 양산 통도사의 백송 등 전국을 쫓아다니며 스케치하고 먹으로 화선지에 그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전라도에는 앉은뱅이 소나무가 많고 경상도에는 키가 크고 울창한 소나무가 많다고 그는 소개했다. 전시를 겨울에 연 것은 추운 계절이 돼야 소나무의 꼿꼿한 기상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소나무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면 그릴수록 매력적인 나무인 것 같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자라면서 가지가 다 위를 향해 뻗지만, 소나무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가지가 아래로 내려오는 겸손의 미덕을 지녔잖아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를 통해 운치와 기품을 느끼고, 솔바람 향기를 통해 머리를 식히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좋습니다.”
출품작들은 길이가 7m에 이르는 작품 등 대작들이 많다. 소나무 사이에 보름달이 희미하게 뜬 작품도 눈길을 끈다.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배병우의 경주 소나무를 그림으로 그린 것도 출품된다. 솔가지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여백을 주면서 다소 추상적으로 그렸다. 작가의 작업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소나무와 관련된 자료도 전시한다(02-395-01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