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징용 피해자 편지 첫 공개] “꿈에도 그리운 고국산천·가족 안부 눈물로 묻습니다”
입력 2012-12-09 23:53
징용 피해자의 절절한 사연 담긴 편지들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부친 편지는 ‘한(恨)’의 기록이다. 고향산천과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가혹한 운명을 향한 회한, 자신들을 버린 조국을 원망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가고 말겠다는 희망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상당수는 수취인 불명이란 이유로 가족에게 전달되지도 못했다. 국민일보는 대일항쟁기위원회가 입수한 편지 3000여통을 추려 최초로 공개한다. 구어체와 옛 표기법만 수정하고 원본을 그대로 옮겼다.
부모님·처자식에게
“부모님 전상서. 밤마다 꿈에서 뵙지만 소식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해방 후 어쩔 수 없이 결혼했지만 1956년에 처가 두 아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 기르며 아이들 안고 울기도 많이 하였습니다.”(66년 3월 13일)
“어머니, 불효자식 재원이입니다. 이국만리 타국 땅에서 30여 년을 어머님 전에 문안을 드리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그간 건강하시고 동생들도 무사한지요. 이곳 불효자식 재원이는 억류생활 타국살이에도 제 몸 하나 무사하오니 안심하십시오. 어머님 어린동생들 기르신다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저는 해방 후 이날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이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곳 교포들이 귀국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외국 귀신이 되고 말까요? 이 불효자식 생각지 마시고 어머님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혹여 이 편지를 받으시면 회답해 주세요.”(74년 4월 15일)
“주태 모친에게. 여보, 30년을 상면 없이 지나 환갑이 넘고 진갑이 되었으니 지금 와서 무어라 편지를 써야 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구려. 주태가 작은 집을 얻어가지고 가정형편이 가사지경 이라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서 날개가 있어서 날아가서라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이도 저도 안되는 일이니 어떻게 하겠소. 귀국만 하게 되면 고국으로 가서 늙었지만 죽는 날까지 살아 봅시다. 만날 때까지 모쪼록 몸 건강하고 아이들 지도하면서 상봉 날까지 건강하오.”(73년 11월 15일)
“김종순씨, 그동안 아이들 데리고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소. 당신 모습도 응당 많이 늙었겠지. 나의 마음 같아서는 한시라도 빨리 가서 그동안 나누지 못한 얘기를 하고 싶지만 마음만 갑갑할 뿐이오. 여보, 당신 덕에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있소.”(80년 2월 28일)
“꿈에도 보고 싶은 아들 찬주에게. 내 나이가 이제 팔십 고개에 달했는데 그 무엇을 바랄 것인가. 상봉의 그날을 기다리고 오늘날까지 기다리다 벌써 6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오직 앞에 닥쳐오는 것은 죽음의 날짜밖에 없구나. 죽기 전에 너희들 얼굴을 보기는 글렀으니 어찌 이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리.”(84년 10월 1일)
“주영아 보아라. 홀로 있는 어머니 덕분으로 1남2녀를 두고 잘 생활한다 하니 매우 반갑다. 그리고 모쪼록 홀로 있는 어머니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이 아버지가 귀국할 때까지 잘 공경하여라.”(73년 11월 15일)
형제자매에게
“우리 동생 정례에게. 이 못난 오빠는 어쩌다가 이곳으로 와서 신세를 망쳤으니 뭐라 할 말도 없네. 그저 남쪽 고향 하늘 있는 쪽만 바라보며 한숨만 쉴 따름이네. 그 언제 우리 남매 상봉할 날이 있을는지. 그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만 할 따름이네.”(1976년 3월 5일)
“오라버님 신병철씨 전상서. 2년 전에 편지를 하였어도 지금껏 소식이 없어 이번에 다시 편지를 하오니 만약 요행히도 편지를 받으시면 회답 한 장 보내주십시오. 저는 조국을 못가서 원한입니다. 소련에 억류된 타국 사람들은 진작 자기 나라에서 찾아가고, 우리 한국 사람만 가지 못하고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74년 3월 28일)
“동생 중식에게. 일제는 수만 우리 동족을 외로운 이곳에 끌어다놓고 데려갈 줄을 모르니 그 야만적이고 비인간적 행위에 이곳 사람들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네. 육십 고개 넘은 우리들이 이제 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 하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고향에 돌아가 조상에게 불효를 사죄하고 형제를 상봉하는 것이 나의 평생소원이네.”(76년 4월 13일)
“일제 때에 편지한 이후 지금까지 44년 동안 편지를 못하고 보니 동생들이 무정타 하겠지. 그러나 가지 못하고 편지해서 무엇 하겠는가 하여 이때까지 편지 한 장 안했는데 지금 한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나의 처 김옥순, 아이들 데리고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그리고 처가 금년에 진갑이로군. 내 나이 벌써 68세인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하지만 조국에 가서 묻히는 것이 소원일세.”(76년 4월 10일)
“광희에게.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면서 지내는 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십여 년이 다해간다. 그 기나긴 세월 속에 청춘홍안은 간 곳 없고 청하지 않는 주름살만 찾아와 옛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노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우리의 고향산천에 지금은 각종 꽃이 만개하여 붉은 산을 이루어놓은 아름다운 시절이겠지?”(82년 5월 26일)
“누님 전. 44년 만에 누님이라고 편지에서라도 한번 부르게 됨을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올해 5월 9일이 제가 서울을 떠나온 지 44년째 되는 날입니다. 그 시간동안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고 젊어서 헤어진 우리 형제 남매들은 어디로 흘러가 버렸습니까.”(날짜미상)
“동생에게. 전번에는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70세 넘은 노인이 아들을 상봉하고 목 놓아 우는 소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 방울방울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네. 우리에게도 그런 희망이 있기를 기대하고 건강 보존하여 굳세게 살아나가고 있네.”(86년 1월 9일)
사망 통보 및 탄원서
“고순애에게. 소련 사할린국 꼬르샤고보시에서 김수남이가 편지를 하는거야. 순애의 아버지 광문씨는 1947년에 나와 결혼해 4남3녀를 두고, 뜻하지 않게 세상을 버리고 말았어. 너의 아버지 하신 말씀이 한국 고향에 딸 하나가 있는데 출생 4개월 만에 사할린으로 오셨다고 항시 눈시울을 적시면서 말씀하셨단다. 아버지는 애타게 항시 순애를 꼭 만날 거라고 하시면서 대한민국 고국 땅을 밝으신다고 날이면 날마다 말씀하셨지.”(날짜미상)
“아주머니 순조씨에게. 그동안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으시고 얼마나 눈시울을 적셨겠습니까. 저는 박지달씨와 이웃에서 살아왔는데 지달씨는 처자를 생각하고 귀향만 생각하면서 독수공방살이를 36년 동안이나 저와 같이 하다가 애석하게도 1980년 4월 24일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81년 2월 27일)
“삼만씨, 저는 1943년 이곳으로 돈벌이하러 왔다 꿈에도 생각지 않은 해방을 맞이하여 지금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삼만씨 형님 억만씨와는 해방과 함께 귀국하려고 애쓰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알게 됐습니다. 억만씨는 지금껏 독신으로 있다가 금년 3월 12일에 기차에 치여 사망하였음을 통지합니다.”(69년 3월 4일)
“형수님 전. 해방된 지 30주년 추석을 맞이한 셈이 되는군요. 짧은 인생에 그 동안의 세월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습니다. 수많은 동포가 그리운 내 고향땅에 가족을 버려두고 있으니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오도 가도 못하고 편지조차 연락이 되지 않고 가족을 끝끝내 만나보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영 가버리는 날이 갈수록 가까워집니다. 1966년 형님께서는 고향에 알뜰하신 형수님 모자 남매를 못 만나봄을 무한 한탄하시다 영 저세상으로 가시고 말았습니다. 이 또한 인생의 소관으로 인력으로 어찌하겠습니까.”(74년 10월 13일)
“우리들은 이곳 탄광으로 온 뒤 20여 년 동안 보고 싶은 부모형제를 못 보고 가고 싶은 고향에 못 가 어려운 상태와 외로운 마음 간절합니다. 단필이나마 귀국의 청원을 드리오니 황해같이 넓으신 도량으로 우리 동포를 잊지 마시고 귀국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66년 6월 19일, 김동조 당시 외무부장관에게 보내는 청원서)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