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징용 피해자 편지 첫 공개] 박노학씨 아들 “아버지는 사재 털어가며 동포 귀환운동 벌이셨죠”

입력 2012-12-09 23:52


고(故) 박노학(1912∼1988)씨는 1943년 충청도 충주에서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 한 가구당 성인 남성 1명이 무조건 징용당하는 상황에서 동생 대신 세 자녀를 두고 현해탄을 건넜다. 7살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 창규(76·사진)씨는 45년 해방 직후 매일 충주 기차역에 나가 아버지를 기다렸다. “올 사람 다 왔다. 나오지 마라”는 역무원 말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60년 아버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아버지는 간략한 인사말 뒤에 ‘앞으로 편지를 보낼 텐데 잘 전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버지는 사할린에서 일본인과 결혼해 56년 일본 정부의 자국민 귀환정책으로 일본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뒤 아버지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수 십 통의 사할린 거주 한인들 편지를 보내왔다.

지난 2일 서울 흑석동 자택에서 만난 박씨는 강제징용 피해자로 일본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아버지가 자기 돈을 쓰면서 사할린 동포 귀환운동을 ‘본업’으로 삼는 게 처음에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초창기에는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지. 적국(소련) 우편물을 국내로 밀반입했다고 치안국에서 조사받고 편지를 압수당했지. 아버지가 귀국해 치안국에 가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몰라도 그 뒤로 아버지가 오시면 나라에서 지프차를 보내줬어.”

도쿄의 작은 단칸방 아버지 집에 가서 드럼통에 가득 찬 편지와 아버지가 꼼꼼히 작성한 ‘화태(樺太·가라후토·사할린 일본 명칭) 귀환자명부’를 본 뒤에는 한 배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박씨가 “일본 어머니, 우리 착한 동생”이라고 칭하는 일본인 부인과 그 사이에 태어난 3남매도 아버지 일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66년 박씨가 전매청에 입사하면서 ‘부자(父子) 우편배달부’ 일은 본격화됐다. 사할린 거주 피해자들 사이에 ‘박노학에게 부탁하면 가족을 찾아준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편지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박씨도 공무원 신분을 활용해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편지를 전국 읍·면사무소에 수소문해 가족에게 전달하는 데 힘을 썼다. 그렇게 30여년 동안 박씨 부자가 전달한 편지는 어림잡아 3만여통에 이른다.

박씨는 “아버지와의 ‘동업’에서 하이라이트는 80년대 초반 사할린 이산가족 상봉 운동을 펼칠 때였다”고 말했다.

“여관 잡아놓고 가족 상봉시키면 밤새 눈물 쏟는 소리 듣느라 잠을 잘 수 없었어. 새장가 들어 미안하다는 남편과 그래도 살아있으니 다행이라는 부인의 울음소리가 기억에 선해.”

88년 한국과 소련의 수교(90년)를 목전에 두고 아버지는 고향 충주에 묻혔다. “기독교인으로 술 한 잔 못하시고 평생을 사할린에 남겨진 동포들 생각만 했던 아버지였지. 이제 나라가 나서서 사할린 동포들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어.” 박씨의 소원이다.

이성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