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의무제 때문에 더 빈곤한 노인들
다가구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서울 화곡1동의 한 임대주택. 지난달 26일 오후 5시 저소득층을 위해 자활사업단이 마련한 세탁소 일을 마친 박정수(가명·63)씨는 두 정거장을 걸어 오후 5시30분 집에 도착했다. 방에는 낮에 허겁지겁 먹고 나간 점심상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김치와 장아찌 뚜껑은 열린 채였다. 냉골인 방 한가운데에는 유일한 난방수단인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가스비 감당이 어려워 한겨울에도 가스밸브는 아예 닫아뒀다. 김씨는 매일 낮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다시 나간다. 오가는 시간을 빼고 숟가락을 뜰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혼자 사는 60대 남자가 돈 아끼고 밥도 챙길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10년 만에 만난 딸이 가져온 고민
불과 3주 전만 해도 김씨는 10여년 만에 만난 막내딸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였다. 딸은 결혼을 앞두고 오래 전 가출한 아버지를 물어물어 찾아왔다. 딸과의 만남이 있고 얼마 뒤 김씨에게는 서류 한 장이 날아들었다. 부양의무자가 있으므로 지원금을 3분의 1로 삭감한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돈을 끊으면 어떻게 사느냐. 화도 내보고 하소연도 해봤지만 담당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7월 20일. 김씨는 지원금이 끊긴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김씨는 그동안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생계·주거·의료급여를 지원받아왔다. 한 달에 한 번 그의 통장에는 적게는 39만원, 많게는 45만원의 돈이 찍혔다. 이 돈으로 월세 4만원과 수도료, 전화비를 내고 나면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식대가 남았다. 가끔 먹을 게 부족하면 인근 교회에 나가 2㎏ 쌀 한 봉지씩을 얻어왔다. 쌀 한 봉지면 5∼6일은 너끈히 버텼다. 하루를 사는 게 늘 빠듯한 생활. 그래도 김씨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지은 지 오래 되지 않은 임대주택은 그가 떠돈 어떤 집보다 깨끗했다. 지난 2월 위층 수도관이 터진 뒤 구청에서는 안방 도배를 새로 한 뒤 새 이불까지 구해줬다. 소주병을 입에 달고 살던 3∼4년간의 서울역 노숙생활. 주먹다짐과 토사물, 신문지와 종이박스 속에서 뼛속까지 떨리던 한밤의 냉기를 생각하면 열 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임대주택의 평화는 기적 같았다.
김씨는 2003년부터 4년 가까이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그는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뒤 1990년대 초반 딸 셋을 떼어놓고 가출했다. 아내가 찾아와 이혼을 요구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저곳 공사장을 전전하며 밥벌이는 어렵지 않게 했다.
“애기 엄마가 이혼하자고 한 뒤에 죽고자픈 생각밖에 없었지. 그 뒤로는 일도 접고 술만 먹었지. 죽어버릴라고. 길거리를 떠돌믄서 술만 죽도록 마셨어. 그라도 죽어지질 않어. 그라다가 (시민단체) 선생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만들어줘서 노숙 생활 그만뒀지. 덕분에 영 굶어죽을 일은 면한 거여.”
김씨에게 수급권은 오랜 노숙 생활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삶의 지지대였다. 그것이 딸과의 만남 이후 사라져버린 것이다. “딸이랑 사위 월급이 있은께 자격이 안 된다는 거여. 이 집도 나가야 한다고 허고. 당장 돈이 뚝 끊기니까 먹고 살게 없잖어. 그렇다고 굶어? 쌀도 사고 해야는데. 어째 할 수 없제. 빌려서 써야지. 3개월 동안 빚도 많이 졌어.”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김씨는 자신이 버리고 떠난 딸들에게 용돈을 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딸들 역시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내가 애들 버리고 여태 타지로 떠돌았는데 이제 무슨 부양을 받는다고 하느냐.” 아무리 설명해도 돌아오는 건 ‘맞벌이 하는 딸네의 소득이 기준선을 넘는다’는 답변뿐이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취직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
“자격이 안 된다고만 하니까, 돈 안 줄 거면 취직이라도 시켜라, 그라믄서 두 달을 쫓아다녔제.”
김씨는 지난달 말 간신히 자활사업단에서 마련한 빨래방에 취업했다. 대기하던 11명 중 취직이 된 건 김씨 한 명 뿐이었다. 장애인시설의 빨래를 수거하고 깨끗이 세탁한 빨래를 다시 배달해주는 게 그의 업무였다. 하루 8시간 일하고 받는 월급은 75만원. 김씨는 월급을 생각하면 벌써 입가에 웃음이 돈다. 얼마나 오랜만에 큰 돈을 손에 쥐는지 모른다. 김씨는 꿈에 부풀었다. 그는 “2년 뒤에는 기초노령연금이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 돈을 조금만 모아두면 어찌 굶어죽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꿈도 꾸고 있다. 당장 자신도 하루 생계가 빠듯한 김씨는 애 낳고 세 식구가 생활비 부족으로 쩔쩔 매는 막내딸에게 매달 5만원씩 용돈을 줄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돈 생기면 가끔 막내딸한테 3만원도 주고 5만원도 주고 그럴라요. 나도 힘들지만 애 데리고 세 식구가 살겠다고 허덕이는 게 짠해서. 근데 갸가 무슨 부양의무자라니 나가 답답하제.”
#등 돌린 전처 자식들이 부양의무자?
서울 영등포에 사는 김순미(가명·78) 할머니는 매일 오전 8시면 인근 전철역 개찰구 앞에 한 시간씩 서서 승객들의 손만 쳐다본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출퇴근 승객이 들고 나오는 신문을 받아 챙기기 위해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루 한 시간이면 종일 동네를 헤매는 것보다 더 많은 신문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다. 올초부터 하루 수확이 절반 아래로 뚝 떨어졌다. 지난달 김 할머니가 신문지와 종이박스를 팔아 벌어들인 돈은 12만5000원. 기초노령연금과 합쳐서 김 할머니 손에 들어온 돈은 22만원 남짓에 불과하다.
3년 전 남편이 세상을 뜬 뒤 김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살던 15평 연립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에게도 2남1녀의 자식들이 있지만 연락은 오래 전 끊겼다. 죽은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들은 남편이 죽고 나자 발길을 끊었다. 당연히 생활비를 보내오는 자식도 없다. 하지만 법이 보는 김 할머니의 상황은 달랐다. 김 할머니에게는 세 명의 생활이 넉넉한 부양의무자가 존재했고, 따라서 할머니에게는 기초생활수급 자격이 없었다. 생계가 어려운 할머니는 매일 폐지를 주우러 다닌다.
그래도 김 할머니는 낙천적이다. 남편과 함께 살던 집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언제 찾아올까, 기대하게 하는 자식들이 없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었다. “이웃집 노인네들 보면 친자식들도 어차피 안 찾아오기는 마찬가지야. 전처 자식은 안 와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 그래서 옆집 할망구들보다 내 처지가 더 나아.”
살 집이나마 마련된 김 할머니는 그마나 형편이 나은 축이다. 실제 부양은 하지 않는 부양의무자 자녀들 때문에 극빈층인데도 도움을 받지 못한 한계선상의 노인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다.
올 들어서 부양의무제 때문에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 노인 여럿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9월 9일에는 요양병원 병실의 방충망을 뜯어낸 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김모(68) 할아버지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혼자 살던 김씨는 부양의무자인 자녀의 소득이 발견된 뒤 지난해부터 정부 지원금이 끊겼다.시설에 사는 병든 아내마저 수급자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하자 고민 끝에 목숨을 끊은 것이다.
지난 8월에는 부양의무자인 사위의 월급이 인상되면서 수급자에서 탈락한 70대 할머니가, 지난해 7월에는 수급 탈락 통보를 받은 뒤 자녀에게 짐이 될 것을 고민하던 70대 노부부가 동반자살을 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노후난민시대] 10년만에 딸을 만났다, 그 후 지원금이 끊겼다…
입력 2012-12-09 1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