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하늘의 만족감
입력 2012-12-09 16:26
언젠가 우리 교회의 부교역자 초빙을 위한 이력서를 받는데 특이한 이력서 한 통이 있었다. 지원자는 40대 초반의 탈북하신 여전도사님이었는데, 그의 자기소개서가 나의 눈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함경도 청진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엘리트였지만 90년대 말 전염병이 북한을 휩쓸고 가던 때 교수 월급으로도 살 수가 없어서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탈북했다.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주던 기독교인들에 의해 마음이 열려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다롄공항에서 그만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북송을 당하게 된다.
끔찍한 시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데 놀라운 기적이 벌어졌다. 자기를 구금했던, 악랄하기로 유명한 북한 경찰 간부가 친히 보증을 서면서 풀어주더라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경찰 간부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놀라운 것은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과정이었다.
그가 고문했던 한 청년이 죽음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를 전하더라는 것이다. 가소로운 마음에 말할 기회를 줬더니 청년은 성경을 줄줄 외면서 전도를 하더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말을 하는 바람에 재판도 없이 총살을 시켜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죽어가면서 전했던 청년의 말이 이 고문 경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의 마음을 강하게 두드린 것은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평안함과 만족감이었다. ‘마음의 심연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평안과 만족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문 경찰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결신을 하면서 신앙을 갖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죽인 청년을 생각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살리는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얼굴에 비취는 하늘의 만족감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언젠가 영화 속에 나온 한마디 대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나를 버리고 딴 여자를 만나는 것도 배신이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하고 슬퍼하는 것, 이 또한 배신입니다.” 그렇다. 배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대방을 차버린 것도 배신이지만 상대방의 사랑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 역시 배신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 이 역시 배신이다.
마더 테레사가 신임 수녀들을 뽑을 때 선발 기준이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족감이 참 신자의 표지라는 통찰력 때문이다. 나의 얼굴에는 하늘의 만족감이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의 배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