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경제] 현금없이 사고 팔고… 화폐 경제를 뒤집다

입력 2012-12-09 15:35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 굶주렸다. 하지만 정과 희망과 낭만이 있었다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청년 실업, 노후 대책 없이 은퇴한 장년층, 높은 청소년 자살률, 낮은 출산율 등 각종 지표는 국민소득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기존의 약탈적 경제구조를 벗어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공동체를 시장경제의 기준이 아닌 상부상조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자는 취지의 지역화폐 운동이 그중 하나이다.

◇지역화폐=레츠(LETS:Local Excahnge & Trading System)라고도 불리는 지역화폐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3000개 이상의 지역에서 유통되고 있다.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상호간 서비스나 상품을 현금 없이 거래하는 형태를 뜻한다. 노동력, 지식, 기술 등을 상호 교환하는 것으로 우리 고유의 ‘두레’, ‘품앗이’와 성격이 비슷하다. 영국은 500개, 프랑스는 250개, 미국과 일본은 각각 20개 이상의 지역화폐가 유통 중이고 매년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전문번역가가 번역을 해주는 대신 자동차 수리서비스를 받는 식이다. 지역통화운동은 지역공동체의식에 기반을 둔 거래를 통해 지역적 일체감을 꾀할 뿐 아니라 지역화폐로 인해 지방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측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선 1996년 격월간 잡지인 ‘녹색평론’을 통해 개념이 소개된 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미래화폐’라는 지역화폐를 처음 도입했다. 이후 경기도 안양의 ‘고잔 품앗이’, 경남 진주의 ‘상봉 레츠’, 서울 송파구의 ‘송파 품앗이’, 대전의 ‘한밭 레츠’ 등이 활동 중이다.

◇서울e-품앗이의 성공=지난 5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서울e-품앗이는 여섯 달 만인 지난달 말 기준 전체 회원수가 2931명에 이르렀다. 물품·서비스 거래건수는 모두 4684건이고, 3200만원어치가 거래됐다.

서울e-품앗이는 서울시내에서 통용되는 공동체화폐를 이용해 회원 간에 품(서비스)과 물품을 거래할 수 있는 교환제도다. 서울복지재단 김양수 수석주임은 “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은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e-품앗이에서 사용하는 기본 화폐단위는 문(門)이다. 1문은 1원에 해당한다. 내게 필요 없는 물건을 팔거나, 내가 가진 재능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문을 받게 된다. 반대로 내가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대가로 문을 지불한다.

서울e-품앗이에서 거래를 하려면 일단 정회원이 돼야 한다. 서울 시민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일단 홈페이지(poomasi.welfare.seoul.kr)에서 준회원으로 가입한 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교육을 받고 운영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정회원으로 승급이 되면 온라인 계좌와 함께 종이 통장 및 1만문의 공동체 화폐가 지급된다. 서울e-품앗이의 기본 조직은 ‘우리품앗이’인데 자치구별로 조직돼 있다. 따라서 회원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우리품앗이의 회원이 돼 서비스와 물품을 주고받는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이익=우리품앗이에서 거래할 수 있는 서비스는 영유아 돌보기, 교과학습, 법률상담, 전기수리, 장보기, 옷수선, 사진촬영 등 무궁무진하다. 물품도 반찬부터 귀금속까지 제한이 없다.

서울복지재단은 서울e-품앗이는 개인과 공동체, 지역 사회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내게 불필요한 물품이 유용하게 재활용되고, 내 기술과 재능을 이웃을 위해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금이 없는 사람도 필요한 품이나 물품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가처분 소득과 개인 저축이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가맹점으로 가입한 지역 상점들도 도움이 된다. 지역주민들이 물품구입에 일정 비율의 공동체 화폐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품앗이 가맹점을 더 찾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마땅히 도움을 청할 데가 없는 일들, 돈으로만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을 함께 할 수 있는 이웃이 생기면서 지역 사회내 공동체 의식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