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23) 백의종군] 백성 위해 몸을 던져라
입력 2012-12-07 19:26
“4월 1일. 맑음. 옥문(獄門)을 나왔다.” 28일 동안 죄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이순신이 사형 대신 백의종군 처벌을 받고 풀려난 날 쓴 일기의 앞부분이다. 그는 파직 세 번, 백의종군(白衣從軍) 두 번을 겪었다.
첫 번째 파직은 38세 때였다. 상관의 정실 인사를 거부했다가 보복당한 것이다. 그 후 최전방인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으로 일하다 사형의 위기를 모면하고 파직된 후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이순신은 상관에게 여진족 침략을 우려해 병력 증원을 요청했으나 무시되었다. 그의 예상처럼 여진족이 침략했고, 다리에 화살을 맞아가며 격퇴했다. 그러나 상관은 책임 전가는 물론 패전 장수라며 죽이고자 했다. 상황을 파악한 조정에서 백의종군 처벌을 명했다. 1597년에는 녹둔도 사건 때 이순신을 옹호하며 사형을 면하게 했던 선조가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고문하여 내막을 밝히라”고 할 정도로 이순신을 비판하며 강경한 처벌을 요구했다. 원로대신 정탁 등의 탄원으로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백의종군이 바로 이순신의 시련 상징으로 떠오르는 백의종군 사례다.
1597년의 백의종군은 그가 겪었던 다른 백의종군이나 시련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존(至尊)인 임금의 명령을 거부했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손자’ 등의 병법서에서는 “군주의 잘못된 명령은 장수가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순자(荀子)도 “위태로운 곳인 줄 알면서도 명령에 따라 장졸들을 보내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하지 마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따라 적을 공격하지 마라. 군사와 백성을 속이는 명령은 거부하라”고 했다. ‘잘못된’ 명령 거부도 병법의 원칙의 하나다.
이순신은 원칙을 지켰고, 군사와 백성의 안위는 물론 무모하고 무지한 전략이 가져올 더 큰 위기를 막기 위해 “전쟁을 시험 삼아 할 수는 없다”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잘못된 명령을 거부했다. 백범 김구도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아라. 그것이 장부(丈夫)”라고 했다.
자신의 생명과 출세를 던지는 대신 진실을 따르는 용기, 백성과 군사들의 삶을 지키려는 결단의 상징이 백의종군이고, 이순신과 김구의 삶이다. 사욕에 눈이 멀어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이 쓰는 정치권의 ‘변명용 백의종군’을 냉정하게 심판할 때다.
박종평(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