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무형유산 아리랑] 일제강점기 때는 저항의 노래로 널리 불려… 기원 놓고 40여가지 說 분분

입력 2012-12-06 18:54

아리랑은 언제 처음 만들어진 것일까. 그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민요 ‘아리랑’은 기록이 아닌 구전되는 노래여서 어원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40여 가지 설이 분분하다. 대표적인 학설은 19세기 말 조선 흥선대원군(1820∼1898) 섭정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무렵 전국에서 부역꾼이 아내나 연인과 떨어져 있게 되자 한탄하며 부른 노랫말 ‘나는 님과 이별하네’(아이랑·我離娘)의 ‘아이랑’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강제로 내야 하는 ‘원납전’이 부담스러워서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단원아이롱 불문원아이롱·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 떠돌았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한양대 김영운 교수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강원도의 향토민요였던 아리랑이 서울 경기도 지방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기원전 69∼기원후 4)의 비 ‘알영’의 덕을 찬미하기 위해 지은 시가 등이 ‘아리랑’이라는 말로 변했다는 알영설, 여진어에서 고향을 뜻하는 말 ‘아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아리랑은 조선에 이어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때로는 서정가요로, 때로는 저항의 노래로 변주되며 민족의 애환과 같이했다. 강원도 정선아리랑은 특히 곡조와 노랫말이 서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강가를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처녀 총각의 상황을 표현한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등의 대목이 그렇다.

일제강점기, 아리랑은 저항의 노래였다. 특히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1926년)의 개봉은 항거 정신을 담은 아리랑을 전국적으로 유행시키며 ‘통속 민요화’가 되도록 한 기폭제가 됐다. 1920∼1930년대 간도 등으로 살길을 찾아 떠난 실향민에게 사랑받으며 해외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현대에 와서도 1970∼1980년대 운동가요로 성격이 바뀌거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응원가로도 불렸다. 아리랑은 정선 아리랑,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등 3대 아리랑을 비롯해 현재 한반도에만 총 60여종이 존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손영옥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