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그늘에 스며든 중국 현대사… 노벨상 작가 모옌 자전에세이 ‘모두 변화한다’
입력 2012-12-06 18:05
한 탁구소녀가 있다. 그녀를 지역탁구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해 초등학교 선생이 특별훈련을 시키는 중이다. 열사의 아들이자 혁명위원회 부주임인 키 작은 류 선생. 며칠 전 그 선생에게 ‘두꺼비’라는 별명을 붙였다는 누명을 쓴 채 학교에서 제적당한 한 소년이 담벼락 한 구석에 기대서서 이들을 지켜본다. 소녀가 스핀을 먹여 날린 공이 한순간, 그 선생의 큰 입으로 쏙 들어간다. 선생은 탁구공을 토해내지 못하고 버둥거리며 괴성을 질러대고 소녀는 탁구채를 내던지고 그대로 달아나버린다.
중국 산둥성 가오미현 출신으로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莫言·57)의 비망록 속엔 탁구소녀 루원리와 두꺼비처럼 입이 큰 류텐광 선생 그리고 루원리를 짝사랑한 빈농의 아들 허즈우가 산둥 평원의 태산처럼 우뚝 서 있다. 담벼락 한 구석에 서 있던 천덕꾸러기 소년은 모옌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1973년 가을, 목화가공공장에서 일하던 모옌에게 허즈우가 찾아온다. “십 위안만 빌려줘. 나 관둥으로 갈 거야. 이제 곧 서른인데 아직 마누라를 얻을 엄두도 못 내. 세상에 나가 한번 굴러보는 거지 뭐. 나무는 옮기면 죽지만 사람은 옮겨야 산다잖아.”(44쪽)
허즈우는 십 위안을 빌려 네이멍구로 떠나고 모옌 역시 1976년 인민해방군으로 복무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1979년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고향을 찾은 모옌은 어느 날 루원리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는 소련에서 생산된 국방색 가즈 트럭을 몰던 운전수로, 가즈를 빠른 속도로 몰면서 닭이며 개를 숱하게 치어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던 국영농장의 영웅이었다.
한국전쟁 때 인민해방군을 태우고 전쟁터를 달리던 가즈는 총탄 구멍이 난 그대로 먼지를 풀풀 날리며 국영농장을 내달렸으니 모옌은 루원리의 아버지와 더불어 가즈 트럭이 궁금했던 것이다. “며칠 전에 그 허즈우란 놈이 네이멍구에서 전보를 쳤더군. 팔천 위안이나 되는 거액을 지불하고 이 구닥다리 차를 사겠다고 말이야.”(104쪽)
세월은 흘러 1987년 가을, 작가가 된 모옌은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 촬영 현장에서 소품으로 사용된 낡아빠진 자동차를 보며 가즈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자동차는 가즈와 비슷하긴 했지만 차량 앞 보닛이 개조된 게 영 딴판이었다.
1992년 봄. 느닷없이 누군가가 모옌의 집 대문을 두드린다. 대문 앞엔 허즈우가 서 있었다. 허즈우는 네이멍구 교통부에서 정식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제 가오미현으로 돌아와 만년에 이른 부모를 돌봐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즈의 행방을 묻는 모옌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모르고 있었냐? 장이머우 영화제작팀에게 팔았는데. 장원이랑 그 술도가 일꾼들이 가오량주 단지를 잔뜩 싣고 가서 폭탄 대신 불을 붙여 태운 그 자동차 있잖아. 그게 바로 루원리 아버지의 가즈51이야.”(122쪽)
오늘날 탁구소녀 루원리는 기나긴 인생 역정 끝에 류 선생과 재혼해 딸 하나를 둔 늙은 할머니로 변해 있다. 류 선생은 겨우 예순을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떴고 허즈우는 산둥성 제일의 도시 칭다오에 하늘 높이 치솟은 마천루를 몇 개씩 소유한 갑부가 됐다.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제적생이던 모옌이 작가로 변했다는 것이 가장 극적이지 않은가.
변하는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가즈51의 변신은 또 어떤가. 모옌이 인도의 한 출판인 부탁으로 쓴 자전적 에세이집 ‘모두 변화한다’(생각연구소)는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붉은 가오량주를 뒤집어 쓴 채 화염에 휩싸여 장렬한 최후를 마친 가즈51처럼,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시간의 화염에 휩싸인 채 타오른다. 문현선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