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기수] 차기 정부의 버킷 리스트

입력 2012-12-05 19:52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와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 ‘내 딸 서영이’와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각각 암 관련 책 두 권과 KBS 2TV의 주말 드라마 및 2008년 국내 극장가에서 상영한 바 있는 미국 영화의 제목이다. 출현 시기와 장르가 다른 이들을 한데 묶은 이유는 몇 가지 공통점 때문이다. 바로 말기암 환자와 죽음, 그리고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청어람미디어)는 일본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암 연구 현황을 취재, 보도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다. 지은이 다치바나는 방광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암 환자다.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컬처그라퍼)는 서울대 암병원 암통합케어센터 윤영호 교수의 저서다. 그는 말기암 환자들이 품위 있고 아름답게 남은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돕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제도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내 딸 서영이’는 한 가정에서 아버지가 갖는 의미를 다각적으로 표현, 눈길이 가는 드라마다. 요즘 뜻하지 않게 회사를 그만두게 된 최민석(홍요섭)이 가죽재킷 입고 오토바이 타기, 젊은이들이 다니는 클럽에 가보기, 연기자에 도전하기 등 그동안 꿈꾼 ‘버킷 리스트’를 실행 중이다. 그의 딸 호정(최윤영)은 한 대학병원에서 감정의 기복이 심한 말기암 환자를 간병하는 자원봉사자로 그려진다.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을 가리킨다.

영화에선 말기암 진단을 받고 한 병실을 쓰게 된 자동차 정비공 카터(모건 프리먼)와 병원 재벌 에드워드(잭 니콜슨)가 의기투합해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포기하고 함께 여행을 하며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 즉 버킷 리스트의 소원들을 하나씩 이뤄나가는 것으로 돼 있다. 그동안 두 사람의 여생은 점점 희망으로 채워지게 되고….

우리의 몸에는 60조개의 세포가 있다. 세포 하나하나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개월 살고 소임을 마친 뒤 자살하는 방법으로 죽는다. 그 자리는 새로운 세포가 채운다. 죽어 없어지는 세포와 새로 태어나는 세포가 균형을 이루게 인체는 평생 동안 1경번 세포분열을 한다. 1경은 1조 뒤에 0이 네 개 더 붙은 숫자다.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분열을 계속하다 보니 고령자일수록 오류가 생길 확률도 높아진다. 암세포도 이런 오류로 인해 생긴 돌연변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말기암이란 이 암세포가 ①죽지 않고 끝없이 분열하면서(무한 증식) ②주변 정상세포 속으로 파고들고(침윤) ③체내 다른 부위로 이동해 새 식민지를 만들어(전이) 기대수명이 평균 2개월여에 그치는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암 환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다가 그런 병에 걸리게 됐고, 치료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등과 같은 ‘과거’를 캐는 일이 아니다. 통증을 조절하며 하루밖에 못 살더라도 남은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이를 위해 나라에서 제도적으로 꼭 지원해 줘야 할 일이다. 국내 병원의 암환자 관련 시설의 99%는 초기 및 진행암 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기암 환자들은 들 곳이 없으니 병원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고 집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기도 쉽지 않다.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누가 되든지 차기 정부의 버킷 리스트에는 나라 경제를 일으켜 젊은이의 일자리를 늘리는 것만을 올려선 안 된다. 국민이 늙고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됐을 때 모두 품위 있는 죽음을 누릴 수 있도록 호스피스완화의료 시설을 대폭 확충하는 정책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