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상온] 왕실의 추억

입력 2012-12-05 19:53

인류 역사 이래 최상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면 가장 오랜 기간을 인류와 함께한 체제는 왕정, 곧 군주제다. 적어도 19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흔한 정부형태였으며, 20세기 들어서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유럽에서 왕정이 아닌 나라는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3개국뿐이었다. 현재도 영국 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16개 영연방국을 포함해 44개국 또는 지역이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군주제는 당초 부족장이 종교적 제사장의 기능까지 갖게 됨에 따라 형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여기서 왕은 ‘하늘, 즉 신이 낸 존재’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이것이 후대의 왕권신수설이나 중국, 일본에서처럼 왕은 ‘신의 아들(天子)’ 또는 ‘살아있는 신(現人神)’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오늘날 완전히 폐기돼 아직까지 남아있는 군주국들도 대부분 실제 주권자는 국민인 입헌군주국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군주제의 효용성은 아직 다하지 않은 것 같다. 먼 미래를 그린 많은 과학소설과 영화들이 미래의 정치체제를 군주제로 묘사한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은하제국이 한 예다. 아마도 광년 단위로 떨어진 우주 곳곳에 건설된 식민지나 행성 동맹들의 의사결정을 민주주의 방식을 통해 도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고 보면 일사불란하게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군주제가 훨씬 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현실에서도 왕정이나 왕실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1976년 공식적으로 왕정복고를 실현한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보카사 1세나 21세기 대명천지에 실질적인 3대 공산 세습왕조를 구현한 북한은 워낙 별종이니 예외로 치자.

남의 나라임에도 왕실에 관한 얘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을 보라. 미국의 경우 영국 왕실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뉴스가 된다. 아니 미국뿐 아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엊그제 영국의 왕세손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신문마다 실렸다. 그게 그 정도 뉴스거리가 되는가.

왕실 관련 뉴스는 그뿐이 아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석조전이 옛 모습대로 75%가량 복원됐다는 것도 있었다.“그동안 폄훼돼온 대한제국 및 황실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새롭게 바라보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한국 역사상 유일했던 제국, 본질적으로는 수천년 동안 민족유전자에 각인된 왕정에 대한 복고적 추억 또는 노스탤지어가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