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다섯손가락’ 명불허전의 연기 펼친 채시라 “독한 그녀 받아들였더니 시청자들도 공감”
입력 2012-12-05 17:43
우리나라 드라마의 역사를 논할 때 채시라(44)는 분명 빠뜨려선 안 될 이름이다. ‘여명의 눈동자’ ‘아들과 딸’ ‘서울의 달’ ‘아들의 여자’ ‘왕과 비’ ‘애정의 조건’ ‘해신’ ‘천추태후’….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드라마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품 상당수엔 탤런트 채시라가 있었다.
1984년 한 초콜릿 광고를 통해 처음 얼굴을 알린 그는 내년이면 데뷔 30년차 배우가 된다. 그간 출연한 드라마는 30여 편. 채시라는 팔색조 같은 연기력으로 오랫동안 안방극장의 여왕으로 군림해왔다.
그의 실력은 지난달 25일 종영한 SBS 주말극 ‘다섯손가락’에서 또다시 증명됐다. 아들을 위해서는 천인공노할 악행도 서슴지 않는 채영랑 역을 맡아 관록의 연기를 선보인 것. 작품은 개연성 없는 전개와 자극적인 설정으로 ‘막장’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채시라의 연기만큼은 단연 명불허전이었다.
지난달 30일 그의 남편인 가수 출신 김태욱(43)이 운영하는 서울 논현동 한 웨딩업체 사무실에서 채시라를 인터뷰했다. 방영 내내 ‘막장 논란’에 휩싸인 작품에 출연하며 힘든 점은 없었는지, 하이틴 스타에서 이젠 중견 배우의 위치에 올라선 그는 요즘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들어봤다.
-‘다섯손가락’의 주인공 채영랑은 방영 내내 좌절과 고통의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배역이었다. 이런 역할에 동화돼 몇 달간 연기를 하다보면 심적으로 힘들 때가 많았을 것 같은데.
“워낙 무거운 작품을 많이 해서 부담이 되진 않았다. 평소 성격이 드센 편이 아니어서 채영랑 같은 인물을 연기하면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평상시 표출 못한 감정을 마음껏 터뜨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작품 말미엔 조금 힘들었다. 마지막 27∼30회엔 오열하거나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부담이 돼서) 매일 시험 공부하는 기분이었다(웃음).”
-작품 자체가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막장 드라마’라는 지적도 많았고.
“처음 출연 제의를 받고 감독님을 만났을 때 감독님은 (따뜻한) 모성애를 다루는 작품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상황이나 대사가 자극적이어서) 세게 느껴지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원래 생각했던 작품과 많이 달랐다는 뜻인데.
“그렇다. 감독님한테 말했다. ‘이렇게 세게 가면 곤란하다. 약속과 다르다.’ 그랬더니 감독님은 ‘이렇게 센 작품이란 거 알면 채시라씨가 출연 승낙 안 하셨을 거잖아요?’라고 되물으시더라(웃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아, 이 분들이 나를 필요로 하셨구나.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채영랑을 연기하며 가장 염두에 뒀던 부분이 있다면.
“(‘막장 논란’이 불거졌어도) ‘다섯손가락’이라는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난 만큼 무엇보다 채영랑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마음은 어떨지, 그는 왜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지…. 내가 이런 부분을 이해 못 한다면 시청자도 공감할 수 없지 않나.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는 후회 없이 다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40대 중반의 여배우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도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의 폭이 좁지 않다. 김희애(45) 김혜수(42) 김남주(41) 등 40대 여배우 상당수가 주연으로 활동 중이다. 동료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들이 아직 잘 해나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름답게 나이를 먹고 싶다는 소망은 있다. 멋있어 보이고 싶다. 젊음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란 게 있지 않나.”
-드라마는 30편 넘게 했지만 영화는 1995년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가 사실상 유일한 출연작이다.
“영화 같은 대작 드라마에 많이 출연해서인지 그동안 영화에 갈증을 못 느꼈던 거 같다. ‘절대 영화엔 출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다시 해보고 싶다.”
-배우로서 아직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뭔가.
“나는 배우를 꿈꿨던 사람이 아니다. 그냥 운명처럼 어느 순간 이 일을 하게 된 그런 사람이다. 하다보니 근성이 생기고 노력을 하게 되고,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자신감이 붙으면서 이 자리까지 왔다. 어떤 배우가 되겠노라는 목표를 설정한 적은 없다. 그냥 최불암(72) 고두심(61) 선배님들처럼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롤모델이 되고 싶을 뿐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