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지형은] 아직도 사람이 고마워라
입력 2012-12-04 19:46
영화 ‘미션’의 마지막은 무서운 살육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이 카누를 타고 정글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아이들이다. 어른은 다 죽었다. 몇 척의 카누가 정글 속으로 미끄러지듯 조용히 움직인다. 총소리가 나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피 묻은 십자가가 땅에 나뒹구는 조금 전의 장면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영화의 장면은 살육에서 보존, 전쟁에서 평화, 절망에서 희망으로 움직인다. 끝장나지 않았다. 희망은 있다. 미래는 열려 있다. 아이들이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이들은 자라니까,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니까.
문학 작품에서 큰 비극은 전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의 본질은 사람 사이의 갈등이다. 사람 사이 갈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비극이 느껴진다. 어느 집안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미시적으로 그려도, 갈등이 독하고 질기면 민족 사이 전쟁에서 일어나는 참담함이 느껴진다. 깊은 비극과 무서운 슬픔의 본질은 사람이 싸우는 데 있다.
싸움이 심해지면 사람을 잃어
비극의 한가운데서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걸 표현하는 전형적인 문학 기법이 아이의 출생을 그리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 중에 여인이 아이를 낳는다. 그러면 아직 희망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전쟁터에 나갔는데 행방불명이다. 필시 전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의 태중에서 두 사람의 분신이 자라고 있다. 사랑의 희망이 끊어지진 않았다. 어른들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풍선 하나를 들고 좋아라하며 뛰어논다. 그 아이는 열린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한 보름은 더, 우리 사회는 사람 사이 그리고 집단 사이의 독한 싸움을 보며 살아야 한다. 대선과 연관하여 무섭게 대립하고 있는 두 세력의 싸움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 둘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두 대선 후보를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과 집단이 ‘공개적인 지지 표명’을 할 것이다. 정치공학적으로 정교하게 디자인된 지지 표명도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 큰 두 세력이 거칠게 충돌할 때 다른 집단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사회적 평형이 유지된다. 그러나 다른 영역들도 어느 한쪽을 편들기 시작하면서 편먹기 현상이 확산되면 사회적 대립은 점점 더 무서워진다.
비극의 한가운데 사람 사이의 싸움이 있다. 싸움이 심해지면 사람을 잃어버린다. 싸움은 끝날 수 있지만 사람은 찾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사람 마음과 영혼에 깊게 파인 상처는 영영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선 후를 생각해야 한다. 내년의 경제 전망이 어둡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와 국제 정세가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여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한반도라는 사회적 시공간이 아직도 사람이 살 만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아직도 사람이 고맙다’는 감성까지 짓밟으면 안 된다. 언론이, 사회 여러 영역의 지도자들이, 특히 종교 단체들이 사람이 미래라는 메시지를 유지해야 한다.
삶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삶은 깊은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봤다.
남은 대선전 미래 생각해야
‘늦가을 찬비에 / 떨며 웅크린 작은 새, / 어느 집 부엌 처마 밑 / 따뜻한 담장이 고마워라 // 되돌릴 길 없는 주름 / 오래도 쑤시는 오십견에 / 한 해 도둑맞은 것 같아도 / 오늘 또 살아 있어 / 숨 쉬고 있으니 고맙다 // 사람은 왜 이리 거칠고 / 세상이 언제 이렇게 망가졌나 / 주변이 온통 다 무서워도 / 해맑고 소박한 웃음 하나 / 내 마음 우물이 차오르게 하니 / 아직도 사람이 고마워라 // 아서라, / 무엇이든 불평은 마라 / 누구에게든 원망은 마라 / 누구라서 아니겠는가 / 누구나 고맙고 어여쁘다 / 모두가 하늘 아버지의 딸 아들이다 // 감사와 사랑의 계절이다 / 아, 생명이 깊고 진하다.’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