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아름다운 죽음
입력 2012-12-04 19:21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번 믿어보기, 손녀들 머슴노릇 실컷 해주기, 평생 찍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꼼꼼하게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지난주 국내에서 개봉된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노트’의 주인공이 죽기 전 실행하겠다며 작성한 버킷리스트다. 40여년간 샐러리맨으로 일에 파묻혀 살다 67세에 은퇴해 인생 2막 설계를 하던 69세의 가장 스나다 도모아키는 청천벽력 같은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
죽음 앞에 마주 선 그는 절망하고 슬퍼하기보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장례식장을 미리 둘러보며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마지막 순간 90대 노모에게는 “그동안 고마웠어요, 먼저 가서 죄송해요”, 아들에게는 장례식 준비 등을 다시 일러주며 “모르면 나한테 전화해”라는 농담까지 건넬 정도로 죽음 문턱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가족들은 아빠를 응원하고 딸은 아빠의 6개월 마지막 여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가족뿐 아니라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일본에서는 몇 년 전부터 엔딩노트가 유행했다. 이 노트는 병이 급격히 악화돼 의식이 없어졌을 때를 대비한 것으로, 연명치료를 받을 것인지부터 장례절차와 장례식 참석자 명단, 유언 등을 기록할 수 있다. 일본의 베이비부머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가 은퇴하면서 인생의 종말을 준비하는 ‘슈카츠(종활·終活)’도 붐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고령자가 직면한 간병·의료·상속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슈카츠 강좌부터 슈카츠와 관련된 지식을 측정하는 ‘검정시험’도 시행되고 있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도 요즘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높다. 무의미한 생명연장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오는 21일에는 처음으로 웰다잉 박람회도 열린다. 존엄사 요구가 거세지자 지난달 국가생명윤리위원회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최근 서울대 의과대학 윤영호 교수팀이 전국 만 26∼6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 36.7%가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는 것을 꼽았다. 평생 자식들에게 한 없이 퍼주고 세상을 뜨면서도 자식들에게 짐 되는 게 싫어 홀연히 떠나려는 게 부모들 마음인가보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