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한국 경쟁력의 뿌리 書院
입력 2012-12-03 16:47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없이 운영됐던 지식공동체의 역사와 가치를 되새기자”
독일에서 현대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독일의 저명한 언론매체를 대표하는 30여명의 CEO들로 구성된 방문단과 함께한 자리에서 방문단 대표가 했던 인사말이 퍽 인상적이어서 잊혀지지 않는다. 방문단은 독일을 떠나 중국 상하이와 홍콩을 거쳐 서울에 왔는데 들렀던 도시들은 경유지일 뿐 한국이 방문단의 목적지였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국이 반세기란 짧은 시간에 경제 및 정치를 비롯해 정보통신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선진국 반열에 어떻게 오를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찾아 현장에서 보고 배우려고 왔다”고 했다. 통상적인 인사말로 넘기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조선조 말 고종 18년(1881) 일본에 보냈던 신사유람단이 떠올랐다.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권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의 저명 일간지에 글을 쓰는 한 독일인 자유기고가를 서울에서 만났다. 그가 던진 질문 역시 “오늘의 한국으로 견인한 성장 동력은 무엇인가?”였다. 적지 않은 국내 인사를 만나면서 되풀이하며 물어봤던 질문을 필자에게도 한다고 덧붙였다. 왠지 찾는 답을 못 얻었다는 답답한 심정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동안 한국 사람은 부지런하며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로 문맹이 거의 없어 근대화 과정에 큰 몫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부지런한 국민성과 낮은 문맹률만 가지고는 오늘날 한국의 발전상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인의 높은 향학열은 다른 문화권, 특히 유럽 문화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국민적 향학열이 이미 16세기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서원(書院)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자 그렇잖아도 한국의 사립대학 난립 현상과 과열된 향학열과의 관계를 알고 싶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는 종교계에서 운영하는 신학(神學) 중심의 대학 수준 교육기관이 소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모든 대학교는 국립인 것이다. 우리처럼 대학생의 약 80%가 사립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사실을 이해 못하겠다는 것이다.
독일인에게는 엄청난 재정적 뒷받침이 필수요건인 대학을 사립재단이 운영한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사학 전통이 몇 백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순간 전문가로서 직감이 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높은 관직을 지낸 사회지도층이 벼슬을 놓게 되면 예외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 그 지역 인재들을 육성하던 전통이 있었고 그런 목적을 위해 서원을 세웠다. 낙향한 선비의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은 과거라는 국가시험에 합격해야만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던 사실, 그리고 지방에 위치한 서원이 그 지역 발전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당시 서원들은 중앙정부의 재정적 도움 없이 지역 유지나 개인의 의도에 따라 세워졌던 사립교육기관이었으며 그 역사는 오늘의 사학과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국운이 쇠퇴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걱정하고 통탄하던 당시 사회지도층이나 종교계가 민족중흥의 길을 교육에서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앞장서서 교육기관을 설립했던 것이 현대식 사교육기관인 사립 초·중·고등학교와 사립대학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국내 몇 개 대학들이 100년여의 역사를 가진 것이며 오늘날 한국 발전의 동력을 교육에서 찾는 데 아무 이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이 나라에 서원 혹은 서당이라는 지식공동체의 역사가 없었고 근대 여명기에 사립 교육기관이 없었다면 오늘의 발전을 우리가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조선시대 서원에 뿌리를 둔 오늘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된다.
이성낙(가천대 명예총장·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