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생명나무’ 가득한 푸른 숲을 이루자
입력 2012-12-03 18:32
16세기 문예부흥 운동에서 구조주의 때까지 시대정신은 이성이 중심이었다. 특별히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로 존재보다 생각이 앞선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존재 근원은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자기 존재나 신보다도 앞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예부흥에서 구조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정신사조는 이성으로 판단하고 분석하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선악 판단 개념이 더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이성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상식은 통했다. 아무리 선악판단이 만연해도 이성적으로 설명과 납득이 되면 이해하고 인정했다.
그런데 그때까지의 사조는 세상의 사물이나 인간을 동일시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항하여 동일시를 넘어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이 나왔다. 그런데 다름과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느낌이었다. 그래서 몇 십 년 전만 해도 비록 나와 맞지 않더라도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면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다름과 차이를 나쁜 걸로 생각하고 그것을 전부 감성과 느낌으로 판단해 버린다. 그래서 구조주의 시대까지는 동일시가 폭력이었지만 지금은 차이가 폭력이 되었다. 그 결과 선악판단의 부정적 파괴력이 이성보다는 이미지와 감성의 폭력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사회적 시류와 사상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감정적인 선악 갈등과 충돌을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도 서로 색깔이나 의견이 달라도 이성적으로 인정이 되면 이해하거나 이론적으로만 비판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조건 나하고 이미지나 감정이 안 맞으면 나쁘다고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남이 나쁘다고 하면 무조건 함께 충동질하며 공격한다. 한마디로 감정적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만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교회가 분열과 혼란에 빠지면서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해명할 기회조차 없을 정도로 이미지가 땅바닥까지 실추되며 부정적 인상을 갖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포스트모던의 시류와 인간 중심의 사상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혼란하게 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 은혜, 생명으로만 충만하면 된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생명의 능력, 생명의 풍성함, 곧 생명나무 신앙이 필요한 때이다.
생명 없는 죽은 탁상공론의 이론이 아닌 성도들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생명의 능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생명나무 신앙과 신학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는 6일, 국내외 저명한 신학자들을 모시고 생명나무 신학 심포지엄을 연다. 이제 생명나무 신학을 통하여 혼돈과 공허의 블랙홀에 빠져 표류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길을 열어보자. 지금 한국교회는 감정적인 선악의 갈등과 충돌, 의와 공명심을 가장한 바벨탑 욕망의 표출, 안티 기독교에 편승한 포퓰리즘의 공격으로부터 상처받고 폐허가 되고 있지 않는가. 다시, 한국교회 안에 생명나무 신앙과 신학의 꽃씨를 심어 훗날 생명나무 가득한 푸른 숲을 이루자.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