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곽한주] 분노의 영화와 대선 후보들
입력 2012-12-02 18:29
최근 개봉된 영화 ‘26년’이 조용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2세들이 26년 뒤 학살의 원흉인 ‘그 사람’을 처단하려 한다는 스토리다. 얼마 전엔 ‘남영동 1985’가 개봉했다. 영화는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가 ‘김종태’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22일간 ‘고문기술자’에게 잔학한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의 ‘그 사람’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고, ‘김종태’가 고(故) 김근태 의원이며, ‘고문기술자’가 경기도경의 이근안 경감인 것은 40대 이상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부끄럽고도 쓰라린 역사에 바탕을 둔 영화들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유독 사회·정치적인 주제를 내세운 영화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연초에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와 ‘부러진 화살’이 비평과 흥행에서 호조를 보이더니, 하반기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관객 1200만명을 넘기는 초대박 흥행을 했다.
이들 영화는 사회·정치적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소재와 접근법은 제각각이다. ‘남영동 1985’는 국가폭력의 비인간성을 증언하고 있고 ‘26년’은 광주학살의 책임자인 전직 대통령에 대한 복수를 다룬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400년 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민중적 지도자에 대한 판타지를 풀어놓는다. 또 ‘범죄와의 전쟁’은 범죄와 권력이 손잡는 타락상을 고발하고 있으며, ‘부러진 화살’에서는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한 대학교수(즉 부당해고 노동자)가 사법권력과 맞서 투쟁한다.
대중과 너무 동떨어진 정치권
하지만 표면의 다양성을 넘어서 이들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기존 권력에 대한 분노가 그것이다. 정치권과 제도화된 권력에 의해 짓눌리고 고통당하는 보통사람들의 분노와 저항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남영동 1985’와 ‘26년’은 과거의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주역들이 아직도 떵떵거리며 사는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한 광대의 보름간의 왕 노릇을 코믹하게 그린 ‘광해, 왕이 된 남자’도 클라이맥스는 가짜 왕이 신하들의 탐욕과 사대주의, 민중에 대한 배신에 분노하는 장면이다.
영화를 통한 분노의 표출은 지난해 ‘도가니’ 이후 꾸준히 이어져온 흐름으로, 상업적인 코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대중영화들이 사회·정치적 분노를 영화화해온 사실은 분노가 이 시대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통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들 ‘분노의 영화’에 대중들이 호응한 것은 대중들이 기득권에 대한 분노를 폭넓게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스크린에만 머무는 것 같다. 대선 후보 중 어느 누가 한국영화계가 던진, 그리고 수많은 대중이 호응해온 분노에 제대로 귀 기울이고 있는가. 대중적 분노의 원인을 헤아려 불만의 해소책을 제시하기는커녕 분노의 목소리를 제대로 접수하지도 않는 것 같다.
박근혜·문재인, 영화보고 배워라
정치인들이 대중영화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인지, 대중들의 생각과 열망에 무관심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영화판에 비하면, 이번 대선판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다. 대중들의 분노 게이지에 턱없이 미달한다.
양비론을 주장하며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는 이 시대 대중과 동떨어진 정치임이 분명하다. 대중들의 공감과 자발적 지지도 얻을 수 없다. 우리 대선 후보들은 한국영화를 보고 배워야 한다.
곽한주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