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 그림의 사회학] 유쾌한 저항이냐 악의적 모독이냐… 창의적 아이디어로 현실사회 조롱
입력 2012-11-30 18:39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논란이 된 그림이 내걸린 건 지난달 10일, 서울 견지동 평화박물관에서다. ‘골든타임-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 경례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아기를 출산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그린 이는 화백 홍성담씨. 그는 언론을 통해 “박 후보를 신격화하는 지지자들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싶었다”며 “신이 아이를 낳는 법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성스러운 출산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보름 지난 24일. 홍씨는 블로그에 한 여성의 성기에서 뱀의 몸통을 가진 박 전 대통령이 출산되는 모습을 올렸다. 제목은 ‘출산-1’. 제목의 ‘1’이라는 숫자는 후속작이 나올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이 그림을 본 한 여성 네티즌은 “풍자가 아닌 ‘모욕’이었다. 메시지에는 동의하지만 그런 식의 표현은 거부감이 들었다”고 했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풍자에 있어서 표현의 제약은 없어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생명을 희화하는 식의 풍자는 불편하다”고 말했다.
풍자 그림 논란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종로 일대 벽과 버스 정류장엔 나치 제복과 삽이 그려진 넥타이 차림의 이명박 대통령의 그림이 나붙었다. 지난 5월에는 수갑을 찬 채 29만원짜리 수표를 들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그림이 서울 연희동 일대를 장식했다. 6월에는 박 전 대통령이 그려진 독사과를 손에 든 박 후보의 얼굴이 부산 거리에 나부꼈다.
이 그림을 그린 팝아티스트 이하(44)씨는 “벽보를 붙일 때 모여든 시민들의 통쾌한 웃음에서 현 정권과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염증을 피부로 느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풍자 그림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미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회의감을 표출한 일반 네티즌들의 창작물들이 넘쳐나고 있다.
박 후보의 출산 그림이 나오자마자 한 네티즌은 같은 그림에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얼굴을 합성한 그림을 인터넷에 올렸다. 아기의 얼굴은 김정일 위원장이고, 간호사 복장을 한 안철수 전 후보도 그려 넣었다.
야권 단일화를 놓고 안 전 후보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풍자한 그림도 인터넷에 넘쳐났다. 한 네티즌은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 ‘MLB파크’에 문 후보와 안 전 후보의 단일화 난항을 그린 ‘첫날밤 풍자’ 그림을 올렸다. 첫날밤을 치른 남자(문재인)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에 담배를 피우며 “걱정 마. 오빠가 책임질게”라고 말한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여자(안철수)는 “하자고 해서 했는데…. 잘한 걸까”라며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 밑에는 한 의류업체 로고를 패러디한 ‘NAPPA(나빠)’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식의 풍자 그림도 올라왔다. 또 다른 네티즌은 양측 후보 부인을 등장시킨 풍자 그림을 올렸다.
‘민국 엄마’는 지난달 초 디시인사이드 등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군 이슈다. 민국 엄마는 지난 8월, 문화체육관광부의 ‘게임시간선택제(선택적 셧다운제)’ 홍보 웹툰의 캐릭터다. 게임시간선택제는 부모 등이 신청하는 시간대에는 청소년이 인터넷 게임을 이용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이 제도에 반대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민국 엄마를 성인물 캐릭터로 바꾼 그림을 그려 인터넷에 쏟아냈다. 이미 수십 가지 종류의 민국 엄마 풍자 그림이 나왔다. 한 웹툰은 “어, 뭐야 게임 못하네? 자 다들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며 셧다운제를 풍자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정부의 잇따른 게임 규제에 대한 반발심리로 풍자 그림을 그렸다는 시각이 많다.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인터넷 이용과 관련한 각종 규제에 대한 반항심이 민국 엄마를 풍자해 분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아동 성폭행 등으로 수사당국이 아동청소년보호법 적용을 강화하자 이를 풍자하는 만화도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한 네티즌은 지난달 17일 비디오·게임 관련 사이트인 루리웹에 ‘아청법 만화’라는 제목의 풍자 만화를 올렸다. 이 네티즌은 지난달 20일 비슷한 내용의 ‘아청법 만화2’를 올리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의 발달이 ‘그림 풍자의 시대’ 도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권상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개인매체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개인 풍자의 발달로 이어진다”며 “다만 표현의 자유가 넓어지는 대신 내용의 깊이는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