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분배가 아니라 차별이다

입력 2012-11-30 19:32


“1970년 서울 응암동 시립아동보호소는 거리에서 앵벌이 하거나 밥 동냥하는 그런 아이들 잡아다 수용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좋은 말로 시립아동보호소고요. 우린 고물을 주웠지요…그 시절엔 식모가 굉장히 많았어요. 식모 잘 알아두면 누룽지도 얻어먹었죠…제 생년월일과 이름도 몰라요. 한 경찰관이 79년 주민등록증 만들어주며 나이 정해주고, ‘너 박동식이 해’ 그러더라고요.”(책 ‘포이동 이야기’의 박동식씨 구술)

“72년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어요. ‘선진국’ 필리핀 사람들이 지어준 체육관이었죠. 의전을 담당하던 우리는 만전을 기했죠. 단상에 국기게양 지지대를 설치했어요. 지금 같으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지대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였죠. 체육관에 스팀난방을 잔뜩 했어요. 근데 취임 선서하는데 그 게양대가 난방열에 느슨해져 풀썩 쓰러져 버리는 거예요. 하늘이 노랬습니다.”(손관호 전 총무처 차관)

두 사람의 구술은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그해 12월 27일 박정희가 장충체육관에서 제4공화국을 연다. 농촌 공동체는 급격히 해체되고 상경한 사람들로 사대문 밖 대개는 도시빈민으로 넘쳐났다. 베이비부머들은 그렇게 서울로, 서울로 몰렸다. 넝마주이든, 새마을복 입은 공무원이든 늘 허기졌던 건 마찬가지였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 입성과 먹성이 어느 정도 차이가 날지라도 이들에겐 같은 조건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였다. 그 노력의 궁극적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이든, 출세하는 것이든 세상은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었다. 박씨는 불쌍하다며 도와주는 식모와 경찰공무원을 만났고, 손 전 차관은 “어허 이 사람들아…”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대통령을 만났다. 노력하며 사니 귀인을 만났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그만큼 가족공동체적 사회안전망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차별하지 말고 살라는 경고이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은 분발심을 내면 땅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다. 한데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경고’에 무뎌지고 ‘희망’을 얘기하지 못하는 사회로 추락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번 대선 후보들은 분배, 더 나아가 복지를 얘기한다. 여야 주자의 차이라면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라는 차이일 뿐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에겐 꼭 필요한 정책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유권자는 누구에게 한 표를 행사할까. 분배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임오군란 직전 겨 섞인 배급 쌀을 타 먹는 백성도 아닌 시절이므로 그런 단순 사고로 표를 던지진 않을 것 같다. 문제는 내 손에 쌀자루를 쥐지 못한 분함보다 차별받고 있다는 억울함이다. 당장의 불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그 차별로 인해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때 분노가 폭발한다. 임대와 일반 아파트 사이를 담으로 가로막아 돌아가야 할 때, ‘로스쿨’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음서직을 만들 때 울분이 생긴다. 조선 개국 이래 처음으로 서북 출신 선우업을 고위직 동부승지로 임명한 흥선대원군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차별은 없다’였다. 척족권력을 몰아내며 초기 개혁에 성공한 이유다.

대선을 앞둔 오늘, 겉으로는 차별하지 않겠다면서도 자파 이익 찾는 ‘신(新)척족 권력’의 잔머리를 국민이 모르리라고 본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성(性)검사’와 같은 초짜 검사의 패악은 일선(一線)인 걸 다 안다. 차별은 분배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다. 차별의 요소를 찾아내 기회를 균등하게 주는 후보를 찍고 싶다.

전정희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