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배의 말씀으로 푸는 건강]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전도

입력 2012-11-30 18:03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의사’라는 부제가 붙은 장기려 박사의 전기는 제 책꽂이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읽었으면 하고 꽂아 놓은 것인데 아이들은 관심이 없고 저만 한 번씩 페이지를 넘길 뿐입니다. 박사가 생전에 어느 회보에 실었던 짧은 글을 소개합니다.

장기려 박사 “사랑·믿음의 치료가 인격의학”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생물체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령 또는 정신 작용에 의하여 육체의 병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의대에 찾아오는 환자의 60%는 정신신체의학에 속하는 병입니다. 그 대다수는 환경 때문에 인격이 피곤해져서 피로와 무력증, 두통, 사지통, 복통과 소화불량, 식욕부진, 수면장애들을 주요한 호소로 해서 찾아옵니다. 어떤 분들은 할 말을 하지 못해 병을 일으킵니다. 믿음과 사랑에 인도되는 치료가 인격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찾아오는 이들을 대하는 치료자의 태도로 인해 실망한 마음을 헨리 나우웬이 ‘영적 발돋움’에서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몸의 병은 고쳤지만 비인격적으로 느껴지는 치료를 받은 것 때문에 마음으로는 상처를 받은 채로 병원 문을 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의사들의 모호한 태도와 직업상 풍기는 거리감에 화가 나서 돌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끔씩 질문을 받습니다.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야 하나요, 아니면 친절한 의사가 좋은가요?” 현문우답일지 모르지만 이런 질문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자식들에겐 한몸에 다름 아닌 것처럼 의학 실력과 인간 됨됨이가 환자를 대하는 의사에게는 동떨어진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료를 섬김을 베푸는 통로로 쓰지 않고 때때로 전문 지식을 매개로 권력을 행사하는 통로로 삼아 마음 상하게 해드리진 않았던지요? 질병을 보기에 급급해 정작 그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하진 않았나 돌아봅니다. 심장병이 없으신지, 위장약을 드시진 않는지 병력은 세세히 물어보면서도 굵은 주름에 새겨진 신산한 세월의 내력은 묻지 않았습니다. 바깥의 상처에만 눈이 팔려 내면의 아픔을 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 산골에 열여섯에 시집을 오지 않았겠소. 왔더니 시누에, 시동생에 줄줄이 딸린 식구가 열셋인기라.” 증세에 앞서 병의 진짜 원인인 가슴속 이야기를 내비칠라치면 서둘러 입막음해 버리고 검사처방이나 내밀지 않았던가요?

환자와의 관계를 ‘나-그것’으로 만들지 않고 ‘나-너’의 관계로 회복시키려는 의사들의 자각은 믿지 않는 이들을 대하는 우리 크리스천의 태도에도 적용됩니다.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요일 1:1)에 대해 증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영성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나 때로 공격적이고 조작적이며 드물게는 천박하기조차 한 복음전도 방식은 오히려 전하는 복음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공격적이고 조작적인 전도는 복음정신 훼손

북한에 두고 온 한 여인을 그리며 평생을 홀로 지낸 로맨티스트였고, 최초의 의료보험 제도인 청십자운동을 시작한 사회사업가였으며, 남과 북 양쪽의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탁월한 의학도 장기려 박사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진료 방식을 전도에도 응용해 보고 싶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는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증인의 자세를 되새겨 주는 게 아닐는지요.

<대구 동아신경외과원장· 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