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스티브 린튼] 북한 의료사역 15년 “정치적 상황에 얽매이는 것 보다 생명이 더 중요”

입력 2012-11-30 19:31

“우리 조상들이 고종 폐위를 요구하거나 왕이 반드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글을 써 조선에 왔다면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 당국이 허용하는 선에 만족하고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헌신했기에 조금씩 선교의 가능성이 열려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21세기 한국에 사는 선교사의 후손은 구한말 이 땅을 찾았던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주로 오지에 파견됐던 당시 선교사의 평균 수명은 3년. 많은 선교사와 가족들은 불의의 사고나 풍토병으로 이름도 없이 시나브로 스러져갔다. 이는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1895년 27세의 나이에 조선 땅을 밟은 그는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교육·의료 선교활동을 펼치다 광주로 이동 중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선교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6·25 전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고난의 역사마다 이들은 한민족과 기꺼이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이러한 한국 선교 역사의 흐름 가운데 스티브 린튼(62·한국명 인세반) 유진벨 회장이 있다. 그는 유진 벨의 외증손이자 한남대를 설립한 월리엄 린튼(한국명 인돈) 선교사의 손자다. 그 역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1995년부터 70여회 북한을 오가며 의료지원 사업에 매진했다.

남북 간 경색 국면에도 그는 사랑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요청으로 97년부터 식량 대신 결핵약과 의료 기자재를 지원해 온 유진벨 재단은 핵실험, 천안함 사태와 연평해전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때에도 어김없이 북한 주민에게 결핵약을 전달했다. 2007년 이후부턴 북한 의료진의 요청에 따라 일반 결핵약보다 비용이 150배 비싼 다제내성결핵약과 처방전을 제공하고 있다. 2008년 19명에서 시작한 수혜자는 현재 1024명까지 늘었다. ‘정치에 얽매이기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조들의 신념처럼 그 역시 15년간 북한의 약자를 위해 이 땅에 남았다.

흔치 않은 오솔길

1950년 미국에서 태어난 인 회장은 학창시절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보냈다. 전라남도 순천의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1년 만에 학교를 떠났다. 결핵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홈스쿨링을 받았고 완치 이후엔 미션스쿨인 대전외국인학교에 갔다. 대학은 미국에서 먼저 진학했다. 68년 플로리다 주립대에 입학한 인 회장은 수학 도중 한국에 돌아와 연세대 철학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후 다시 미국에 돌아간 그는 83년 컬럼비아대에서 철학 석사를, 89년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부모의 선교 사역은 숭고한 일이었으나 때로 그에게 불편함을 줬다. 어린시절 그는 동갑내기들과 다른 ‘푸른 눈의 외국인’으로 살아야 했고 때론 결핵에 전염돼 고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남다른 삶에 불편함보다는 ‘흥미’를 더 크게 느꼈다. 인 회장은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좋았다.

선교사의 자녀로 한국에서 자라 한국말을 하고 미국 대학원에서 북한을 연구한 덕분에 그는 어디에서나 주목을 받았다. 특이한 이력 덕택에 그는 미국 대학, 언론, 비정부 기구로부터 자문 요청을 적지 않게 받았다. 79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인 회장은 92년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평양 방문에 통역으로 동행해 김일성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또 94년 미국 CNN의 ‘김일성 장례식 특집’에 한반도 전문가로서 출연했다.

컬럼비아대 교수이자 같은 대학 한국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지내던 그는 95년 북한의 한 지인으로부터 요청을 받는다. ‘식량이 부족하니 외부에서 지원을 해 주시면 환영하겠습니다’란 내용이 담긴 북한 보건성의 편지 한 통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북한 당국이 해외 원조를 기다린다는 걸 알게 된 인 회장은 재미교포의 지원을 기반으로 한 민간 대북원조 기구를 만들었다. 이름은 외증조부 이름을 따 ‘유진벨 재단’이라고 지었다. 자신이 선교사의 후손이고, 기독교적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이 단체가 출범했음을 북한에 알리고 싶어서였다.

“사실 북한을 돕게 된 특별한 계기랄 것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자연히 북한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요. 79년부터 방문했으니 그때부터 알게 된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습니다. 미국에선 북한 전문가가 적어 다양한 기관에서 많이 찾았죠. ‘흔치 않은 오솔길’을 걷다보니 북한과 관련된 여러 기회들이 생겼고, 이것이 일종의 ‘부르심’이 돼 북한 관련 일을 20년 가까이 하고 있네요. 처음엔 이렇게 오래 할줄 상상도 못했지요.”

한민족의 숙제, 결핵 퇴치

2∼3년간만 재단을 이끌고 이후엔 남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는 게 인 회장의 원래 계획이었다. 목회자나 자선사업가보다 교수가 적성에 맞았던 그는 유진벨 재단 이후에 할 여러 일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북한에서는 같은 민족인 남한 사람이 아닌 외국인에게만 입국과 의료 지원을 허용했다.

외국인에게만 대북지원 사업이 허락됐다곤 하지만 인 회장 외에 다른 이가 이 일을 하기는 힘들었다. 북한 의사들이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 한국어를 모르면 당장 일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무 교섭에서 더 많은 환자의 치료 권한을 얻어내기 위해선 북한 사람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호간 신뢰를 구축하는 일도 중요했다. 여러 조건을 볼 때 인 회장 아니면 대체할 인물을 찾기 어려웠다.

북한 내 결핵환자들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도 그가 이 일을 떠날 수 없게 했다. 유진벨 재단은 2007년부터 결핵 치료에 실패해 일반 결핵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다제내성결핵(슈퍼결핵)약을 환자에 따라 2년∼2년6개월간 지원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의 진단시설이 부족해 일반결핵과 다제내성결핵 구분 없이 항생제를 제공하는 데 있다. 다제내성결핵 환자의 경우엔 이미 내성이 생긴 항생제를 복용해선 안 된다. 차도는커녕 ‘슈퍼 박테리아’로 균이 변형돼 다제내성결핵이 발병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기간에 정량을 지켜 먹어야 하는데 약이 귀한 탓에 조금만 나아도 약을 끊고, 이웃과 나눠먹어 현재 북한 내 다제내성결핵 환자 수는 예측하기 어려운 수준이란 게 재단 측의 설명이다.

환자들에게 정확한 진단과 약을 제공한다면 병의 확산을 줄일 수 있지만 현실은 요원하기만 하다. 비용의 제약과 다제내성결핵 요양소 수용 인원 부족 때문이다. 재단이 관리하는 북한 내 요양소 8개만이 다제내성결핵약을 주기 때문에 이들이 방문할 때면 항상 구름같이 환자들이 모여든다. 예비 번호라도 받아 치료약을 2년간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 있을까 해서다. 인 회장은 이들을 볼 때면 항상 놀랍고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치료에 실패한 환자를 보거나 약을 위해 길게 늘어선 예비 등록자를 보면 참담합니다. 이 약은 부작용 가능성 때문에 미국에선 돈을 주고 처방하는 약이에요. 그런데도 이들은 줄을 서서 받습니다. 이것 외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통일 이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이 올 겁니다. 가히 한민족의 숙제라 할 만하죠.”

다행인 것은 북한이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 북한은 2009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 출신 교포를 지원 사업에 투입되는 외국인 팀에 참여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지금도 예측 불가능한 일투성이고 후임자로 나서는 사람도 없어 막연한 계획밖에 세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민족끼리 이 일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넘기고 은퇴할 계획이에요. 근데 누가 이 일을 하겠어요, 결핵 환자들 객담 받칠 사람 찾기 힘들지….”

예수를 믿는다면, 당신부터 나서라

북한을 직접 드나들고 환자를 돕는 인 회장은 북한과 관련된 모든 발언에 신중을 기했다. 특히 역대 정권의 대북정책이나 북한과 미국 내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향후 남북관계가 어떻게 개선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전쟁이 안 일어나고, 더 많은 민간 교류가 가능해지고, 민족간 더 화목해지는 한반도가 되길 원하지만 이를 어떤 정치지도자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지요.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누가 돼도 대북정책에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한국도 큰 차이 없을 거라고 봐요. 다만 경색 국면이 지속되면 남북한 모두 불리하니 서로 돕는 방향으로 가야겠지요.”

그는 대북사업에 있어선 주어진 상황 안에서 도울 수 있는 ‘오늘의 방법’을 찾는 게 더 현명하다고 했다.

“30∼40년간 정치에 과잉 기대를 해 실망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다음 선거에 다른 사람을 기대해도 (실망하는 건) 마찬가지죠. 대북사업에선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구호보다 현실적인 ‘요령’과 목표를 세우고 밀고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계획대로 통일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목적을 찾아 일해야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날’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인 회장은 많은 이들, 특히 교인들로부터 북한을 돕는 일에 정부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답답하다고 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어 북한 돕기에 한국 교회가 나서길 당부했다.

“성경에 어려운 이 돕는 일을 먼저 정부에 맡겨야 한다는 구절이 어디 있나요. 정치 상황이 어려울수록 민간의 힘으로 도와야지요. 한국 교회가 한 발짝 더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들에게 제일 무서운 병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결해 줬다는 걸 알게 되면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극을 받을까 생각해 봐요. 한국 교회는 세계 역사상 가장 활발하고 부유한 교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왜 같은 동포가 필요한 약을 구할 수 없게 살도록 내버려두죠? 우리 선조들도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정치권 눈치 보지 않고 조선 사람들에게 의료 지원했는데….”

지난 15년간 매일 기적 아닌 날이 없었다는 인 회장은 재단에서 하는 모든 일이 헛되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했다.

“시편 90편을 보면 모세 같은 사람도 일이 헛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죠. 저도 ‘부디 유진벨 의 모든 일이 헛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악조건에서도 맡겨진 치료를 정확하게 해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