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배준호] ‘압축복지’ 어디까지 가능할까

입력 2012-11-29 18:45


우리의 경제발전 과정은 곧잘 ‘압축성장’으로 표현된다. 동일 세대가 세계 최악의 빈곤 상태에서 제법 풍요로운 상태로 발돋움함으로써 인류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빈곤탈출 사례를 기록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경제발전의 기적으로 식민지 국가에서 50년이 안 되어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었다. 배경에는 창의적인 기업인과 근면한 근로자, 우수한 초중등 교육이 있었다.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관은 개발도상국의 경제, 사회발전을 지원하면서 이들 나라의 지도자와 공무원에게 한국의 발전 사례를 배우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십수년 전부터 한국개발연구원 등이 새마을운동을 위시한 우리의 발전경험 전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근자에는 민주화 등 정치발전 경험을 전수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해당국 정치체제 등이 굴레가 되어 수강생 반응이 탐탁치 않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필자는 경제에 압축성장이 있었으니 복지에도 ‘압축복지’가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국민건강보험이 그 유력한 대상이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1034달러이던 1977년에 제도가 도입되어 12년 만인 1989년(5418 달러)에 전 국민 보험 체계가 확립되고 2000년(1만1292달러)에 단일보험자 체계로 전환되었다.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양질의 서비스를 균등하게 제공하는 보험체계를 23년 만에 구축하였으니 그러한 표현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건강보험은 개도국은 물론이고 OECD 국가 안에서도 일부 문제점이 없지 않지만 양호한 체계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배경에는 일찍 확립된 주민번호와 발달된 정보기술시스템이 있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개인의료보험에서 실손형 의료보험이 급속하게 확대되었지만 건강보험에 상응하는 심사평가체계가 없어 불요불급한 의료비 지출이 늘었고, 가계 보험료에 부담이 전가되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가 문제의식을 서로 공유하고 있으므로 협조체계를 강화하여 조기에 시정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지금 대선 투표일을 19일 앞둔 시점에서 두 유력후보 진영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의료와 건강보험에 문제가 많다는 인식하에 5년 사이에 14조∼43조원의 예산을 추가 투입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장 적은 14조원조차도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고 암, 심장병, 중풍, 난치병 등 4대 중증 질환에 대한 집중지원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복지 분야 중 의료와 건강보험이 가장 앞서 있다는 사실이다. 연금으로 대표되는 소득보장과 장기요양보험의 현물서비스 보장은 크게 뒤져 있다. 주변에는 가난한 노인이 많다. 경제를 발전시킨 개발기 주역인 20∼40대가 지금의 70∼90대 노인이다. 이들 중 3분의 1 이상이 빈곤 상태에 있다.

그런데도 후보들은 이들 대상의 빈곤 해소와 현물서비스 강화보다 상대적으로 앞선 분야에 대한 선심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면에는 빈곤해소에 기여할 국민연금 등이 장기보험이어서 5년 사이에 크게 바꿔 놓기 힘들다는 사실이 있다.

정리하면 건강보험에서 보듯 복지에 압축발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장기보험인 국민연금은 백년대계의 틀 안에서 설계하고 운영해야 할 사안으로 압축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

건강보험 및 장기요양보험보다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의 충격도 크다. 따라서 복지발전의 우선 과제는 단기보험인 장기요양보험의 현물서비스를 강화하고 조세로 조달하는 기초노령연금의 규모와 운영의 신축화를 통해 빈곤노인의 복지수준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원을 재배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준호 한신대 대학원장